[효원人side] “함께 만드는 오케스트라 선율, 그게 행복”

KNN방송교향악단 서희태 지휘자(음악학 84, 졸업) -드라마 '강마에' 롤모델로 유명 -'김연아 아이스쇼'서 지휘 맡기도 -"세계 최초의 시도··· 보람 느껴" -"예술대 40주년 연주회 감회 남달라"

2022-11-03     김현희 기자

앞길이 막막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우리보다 한 걸음 먼저 내딛은 선배 효원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시리즈 '효원人side'. 그 세 번째 손님은 KNN방송교향악단에서 아름다운 연주를 선물하고 있는 서희태(음악학 84, 졸업) 지휘자다. 

채널PNU는 지난 10월 31일 채널PNU 스튜디오에서 서휘태 지휘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클래식 전문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강마에의 롤모델이기도 했던 그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단원들과 아름다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서희태 지휘자가 지휘하는 모습. [서희태 지휘자 제공]

△바이올린부터 성악, 그리고 지휘까지 많은 음악적 갈래를 접하신 걸로 압니다.

-사실 제 최종적인 꿈은 지휘자였습니다. 제가 84학번으로 재학하던 시절에 지휘자가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성악을 하는 것이었죠. 바이올린은 부산대학교에서 부전공했고, 당시 전국에 지휘과가 없었기에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가서 지휘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음악가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지휘자님의 의견에 가족 구성원들의 반대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예전에는 ‘음악을 하면 딴따라가 된다’, ‘음악을 하면 못 먹고 산다’라는 그런 생각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죠. 정말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인데, 만약 부모님의 결정 때문에 내가 그걸 결국 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언젠가는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 몰래 원서 제출 마감 직전에 아버지께 허락을 받았다고 담임 선생님께 거짓말을 했어요. 그때 아버지는 제가 의과 대학에 지원하는 줄 아셨어요. 그날 이후 집에서 쫓겨났어요. 경제적인 지원은 당연히 못 받았고요. 하지만 저는 그때의 결정을 정말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그 결정을 책임지기 위해서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거든요. 

△2008년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예술 감독 겸 강마에의 롤모델을 맡으셨는데요, 한 드라마의 롤모델이 된다는 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제가 롤모델이 되려고 했던 드라마는 아니었어요. 당시 MBC 작가와 연출자가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만들어 보자 하는 의기투합에서 시작이 되었고, 연출자가 저에게 예술 감독을 제안했죠. 강마에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서 김명민 씨는 제 연주를 계속 보러 오시고, 지휘자가 어떻게 단원들에게 지시하고 이끌어 가는지를 학습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스타일도 닮게 되고, 말투도 닮아가면서 강마에의 롤모델이 된 거죠. 실제로 저는 강마에처럼 깐깐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진 않는답니다. 

△그간 선보이셨던 공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으신가요?

-2009년, ‘김연아 아이스쇼’에서 오케스트라로서 세계 최초로 쇼트프로그램의 반주를 제의받은 적이 있는데요. 사실은 굉장한 위험 부담이 있는 일이었거든요. 음악이라는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라 항상 똑같을 수는 없어요. 기분이 좀 우울하면 속도가 빨라질 수도, 느려질 수도 있죠.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음악이 조금만 느려지거나, 조금만 빨라져도 큰 실수로 이어질 수 있었고, 그 화살은 제가 다 맞아야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 주변 사람들은 저를 말리곤 했죠. 하지만, 저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도전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악보를 보지 않고, 김연아 선수가 연기하는 것만 보면서 지휘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했던 기억이 나네요. 참 많은 새로운 시도를 해 오면서 항상 '뭐든 못 할 건 없다'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소통하는 지휘자로 불릴 만큼, ‘소통’을 강조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관객이 없는 연주는 정말 의미가 없는 연주거든요. 관객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곡을 연주하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어제(10월 30일) 우리가 했던 연주에 추모의 느낌이 있는 곡들이 딱 세 곡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관객들께 “우리가 연주하는 이 곡이 그들에게 추모가 될 수 있는 곡 같다. 여러분들도 추모하는 마음으로 감상해 달라”라는 해설을 전했죠. 

서희태 지휘자가 지휘하는 모습. [서희태 지휘자 제공]

△지휘자로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을 소개해 주세요.

-연주하는 모든 순간에 보람을 느끼는데요. 해외나 국내에서 아주 영광스러웠던 순간도 많지만, 크리스마스마다 주몽재활원이라는 재활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연주도 하고, 선물도 나누는 봉사 활동을 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아이들과 매년 오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온 지 벌써 18년이 됐네요.

또, 올해 11월 1일이 부산대학교 예술대학교가 창립된 지 40주년이에요. 40주년 기념 동문들이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학교 교정에서 연주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동문들이 처음으로 학교에서 연주하는 그 연주도 저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연주일 것 같아요. 첫 연습 때, 반가운 동기도 만났습니다. 느낌이 이상했어요. 이제 곧 환갑을 앞두고 만난 거니까요.

△부산대학교 음악학과 재학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소개해 주세요.

-"왜 쟤는 매일 학교만 끝나면 없어져?"라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은 것 같아요. 앞서 말했듯, 가족들의 경제적인 지원을 못 받아서 독립을 했잖아요. 그래서 저는 학교가 끝나면 끝나기가 무섭게 일하러 다녔어요. 백과사전 외판, 문제집 영업, 바이올린 레슨, 성학 레슨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던 거 같은데, 그중에서도 학교 공사판에서 일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아마 가정대학(現 생활환경대학) 신축하고 있을 때였던 것 같아요. 근데 바로 옆에서 친구들이 막 웃으면서 다니는데 저는 거기서 이제 지게를 메고 있었죠. 그때 저를 눈여겨보셨던 선배님이 "서희태 너는 사하라 사막에 보내도 콜라 한 병을 차고 나타날 놈이다"고 이야기하셨죠. 그게 가장 기억에 많이 나요.

△앞으로 어떤 지휘자로 기억되고 싶은지, 인생에 있어서 어떤 목표를 이뤄 내고 싶으신지 궁금해요.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저는 항상 큰 목표를 가지고 살아오지 않았었어요. 제 목표는 굉장히 소소했었죠. 제가 가장 추구하는 것은 ‘행복한 삶’이에요. 세계 최고의 지휘자가 되길 원하지도 않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휘자가 되길 원하지도 않아요. 저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단원들과 가장 아름다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제가 가장 원하는 일이에요. 

인생을 살아오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꼭 대단한 성공을 이뤄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나와 살을 맞대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저에게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하는 일이 사회 속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력을 끼치면, 그곳에서 저는 가장 큰 행복을 얻곤 하죠.

△‘자신이 좋아하는 길로 갈 것이냐’, ‘취업이 잘되는 길로 갈 것이냐’ 고민하는 학생들이 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찾아 음악가의 길로 나아가게 된 ‘효원인’으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잖아요. 그래서 저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 대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라’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저 또한 스무 살 때 음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저는 후회했을 거예요.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성과를 얻는 삶을 산다면 너무나 행복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후회가 남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