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중심대학] "이제 논문은 양보다 질로 평가해야"
유인권 초임 연구처장 인터뷰 -"정량 평가가 질적 저하 야기" -"교육과 연구 분리·개편 필요" -"전임 연구원·기술 인력 충원"
‘부산대가 좌초하고 있다’, 유인권 연구처장이 2018년 평교수이던 시절 무기명으로 부대신문에 투고한 칼럼의 제목이다. 유 처장은 이 글에서 ‘(부산대는) 좌초한 채 그 배 안에 남아 굶어 죽게 될 것'이라며 우리 대학의 경쟁력 약화를 지적하고 여러 대안을 제시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유 처장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지난해 3월 연구처가 신설됨과 동시에 초임 연구처장 맡은 유 처장은 “부산대의 떨어지는 위상을 봤을 때, 대학이 망하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라며 “모두가 그걸 알지만, 자기 때는 안 망하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학 경쟁력 회복을 위한 로드맵인 '부산 누리 비전(Pusan NU Research Institute world Vision)'을 구상하고 공청회를 여는 등 대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수도권 편중이 심한 상황에서 이를 이겨 낼 방도는 연구력을 통한 극복뿐”이라는 유 처장을 <채널PNU>가 지난 3월 9일 만났다.
△사실 학교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인력과 자본이 서울로 몰리기 때문이 아닌가요.
-맞아요. 근본적인 원인은 돈과 사람이 수도권에 몰리는 거죠. 수도권에 인력과 돈이 모두 집중되니 지방은 성과가 떨어지고, 그러니 다시 자원은 수도권에 몰리는 악순환의 고리가 생겼고, 학교가 망해 갑니다. 여기에 우리 대학이 잘못한 건 없어요. 우리는 지금까지 잘 해왔는데, 그냥 물이 빠지는 거예요. 물이 빠져서 배가 앞으로 안 가는데 죽도록 노만 저으면 된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직 우리 대학은 다른 대학에 비해 좀 나으니까 실감하기 어려운 거죠. 서울에 일자리와 돈이 몰려 있는 상황을 바꾸긴 어렵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물에 빠진 상황을 인식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거죠. 확실한 건 부산대는 망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학교가 되느냐가 중요하죠. 지잡대나 시립대로 전락하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습니까.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연구의 양이 아닌 질 위주의 평가 △교육·연구시설을 분리하고 연구시설 위주 개편 △인문·사회·자연 등 기초과학 투자를 통한 연구 생태계 복원입니다. 먼저 첫 번째, 지금 연구 성과가 너무 떨어진 상태입니다. 학교에 사람도 돈도 부족한데, 안간힘을 써서 수도권 대학과 같은 양의 논문을 써내고 있어요. 수도권의 자원 투입이 두 배 이상인데도요. 그러다 보니 질적 성과가 수도권에 비해 60%에 불과합니다. 같은 돈으로 논문을 두 배 써내고 있는 거예요. 연구처에서 첫 번째로 하는 것이 연구의 방향을 양에서 질로 바꾸는 겁니다. 우리 대학이 교수들 평가를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논문 편수만 가지고 하는 정량평가가 아직 대부분입니다. 2년마다 논문을 한 편씩 무조건 써야 하고, 승진할 때는 4년 동안 5편 이상 투고하는 식이에요. 이렇게 양 위주로 평가하니까 질은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거죠.
△그럼 정성평가로 바꿔야겠군요.
-그렇죠. 연구처에서 이미 그렇게 하려고 시도 중이에요. 이걸 완전히 뜯어고치진 못하더라도, 저널의 지명도(IF, Impact Factor)에 따라 연구 편수에다 가중치를 적용한다거나, 장려금에 차등을 주면 교수님들이 더 좋은 논문을 쓰고 싶어 하지 않으시겠어요?
하지만 지명도만을 기준으로 논문을 평가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질이 좋아도 공대처럼 커뮤니티가 넓고 연구자의 수가 많은 학문에 비해 그렇지 않은 학문 분야는 지명도가 훨씬 약합니다. 애초에 그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 적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는 지명도를 기계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해당 연구 분야 내에서의 상대적 지명도 순위(JCR, Journal Citation Reports)를 이용하는 식으로 좀 더 세심한 고려가 필요합니다.
△연구생태계를 어떻게 복원합니까.
-지금 있는 자원을 재분배해서 효율성 있게 사용하기만 해도 훨씬 나아질 거예요. 우리 학교에 연구소는 100개에 달합니다. 거기에 이공계열은 교수마다 각자 실험실이 하나씩 있죠. 이렇게 교수와 대학원생 같은 연구 인력들, 시설, 인프라가 군소 연구소들 및 학과 교수마다의 연구실로 흩어져 있어요. 시설도 행정도 각각 따로 하겠죠. 이 얼마나 낭비입니까. 연구 인프라에도 더 큰 비용이 들고, 대학원생들도 연구는 못 하고 ‘영수증 붙이기’나 하면서 연구비 관련 행정 처리에 그 좋은 머리를 낭비하는 겁니다. 그리고 연구하면서 교수님들 사이 학제 간 교류도 없겠죠. 본인 학문에만 파묻혀서요. 서로 보고 배우면서 교류해야 하는데요.
또한, 현재 대학의 교육·연구·행정·상담 등 모든 업무가 학과소속의 교수님 1인에게 집중돼 있습니다. 이렇게 연구가 교수 개인에게만 지나치게 의존하니까, 교수가 퇴임하면 연구 자료나 시설이 붕 뜹니다. 교수가 아니라 연구시설 위주로 지속성 있게 연구가 돌아가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연구의 패러다임 자체를 학과 교수 위주에서 대형 연구시설 단위의 인적, 물적 인프라 중심으로 바꿔야 합니다.
△한국에는 그런 사례는 없는 것 같은데요. 예시가 있을까요.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세계적인 UC버클리의 국립 연구소, CERN(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막스 플랑크 연구소 같은 연구시설이 필요합니다. 세계적인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학에서 나오지 않고, 저런 대형 연구시설에서 나옵니다. 혹은 저런 시설에 연계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교수들도 있고요. 학교에 이런 세계적인 연구소를 10개 만들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어요. 그러면 최악의 경우라도, 최소한 세계적인 연구소 하나는 나오지 않을까요? 이런 연구소들이 있으면 사람은 저절로 모입니다. 여러 군소 연구소와 교수들의 연구시설이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하는 거죠. 그리고 점필재연구소라던가 부산 문화나 민요 같이 하나로 모으기 어려운 ‘로컬한(지역적인)’ 주제들을 위해서도 연구소를 따로 5개 만든다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많은 인력이 필요하겠는데요.
-이를 위해선 대학원생에 의존하지 말고 연구에만 매진하는 인력들이 필요합니다. 교육이나 행정업무 없이 전적으로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는 전임 석학(Research fellow) 연구자도 있어야 하고, 실험 장비를 공동 운영할 기술 인력도 필요하겠죠. 그리고 능력 있는 ‘스타플레이어’급 교수는 사립대·대기업처럼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데려와야 합니다. 동시에 다른 곳에서 들어오는 스카우트를 방어할 필요도 있겠죠. 또한 인력 등 모든 규모가 커진 만큼 좁은 주제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 학문을 포괄하는 공동 연구가 가능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게 가능하게 하려면 학생들 교육이나 행정에 치이지 않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적어도 교육과 연구를 분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과 연구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씀인가요.
-필요하면 그렇게 해야죠. 연구 성과에 따라서 수업 시수와 같은 기계적인 의무 사항에 대해서도 재조정이 필요합니다. 최신 연구를 해야 할 연구자가 학부 1학년한테 ‘미적분 하는 법’이나 고등학교 ‘법과 정치’를 기초부터 가르칠 필요는 없잖아요. 대신 연구시설의 연구 인력들은 교육 자체가 최신 연구 내용으로 채워지는 대학원 수업과 결합돼야 합니다. 연구 관련 인프라도 개인 교수 연구 공간을 연구시설 공간으로 통합해 시설 운영·관리 등을 연구시설에서 하고, 한 교수님이 여러 연구소에 중복으로 등록하시는 것도 못 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대학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인 수도권 편중 자체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해요.
△수도권 집중 문제를 고치는 게 가능할까요.
-학생들도 이렇게 부산에 살고 싶게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법안 제정을 통해 대학 자체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면 사람은 저절로 옵니다. 정치권과 협상을 해서 등록금을 확 줄이고 나라에서 대주는 식으로 한다거나, 공기업을 추가로 들여와야죠. 산업은행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지역 할당제도 확대 개편해야죠. 차정인 총장님은 이미 다른 지방거점국립대 총장님들과 공동으로 법안 발의를 추진 중입니다. 현재 공기업의 지역 할당제 채용 비율이 30%이지만, 이를 50%로 확대하고 반드시 해당 지역에서만 채용해야 한다는 제한사항을 풀려고 해요. 이렇게 되면 우리 대학 졸업생이 비수도권 타지방 공기업에 입사해도 지역 할당제 혜택을 볼 수 있으니까 부산대에 오고 싶겠죠. 전 서울 토박이지만 부산이 정말 좋아요. 학생들이 정말 우리 대학에 오고 싶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채널PNU> 2023년 3월 31일 자 ‘[연구중심대학] "이제 논문은 양보다 질로 평가해야"’ 기사와 관련해 내부 구성원 간 논의를 통해 일부 표현을 수정(2023. 04. 06.)했음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