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로 리포트] (1) 78년의 흥망성쇠
기획 연재 시리즈 [부산대학로 리포트] -부산대학로는 우리에게 어떤 곳인가 -학생운동·청년문화·상권에서 밀려나 -"젊은 활기 찾을 수 없어 아쉬움 커"
부산도시철도 1호선 부산대역부터 우리 대학 부산캠퍼스 정문까지를 ‘부산대학로’라고 부른다. 이곳을 둘러보면 한집 걸러 한집 꼴로 붙은 임대 현수막이 즐비하다. 부산대학로의 역사를 거쳐 온 수많은 이들은 부산대학로가 죽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부산대학로의 몰락’이다.
과거 부산대학로는 정체성이 뚜렷했다. 1946년 우리 대학의 개교 이래 부산대학로는 ‘학생 운동의 중심지’로, ‘청년 인디문화의 성지’로, ‘부산 4대 상권’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독보적인 정체성을 뽐내왔다.
<채널PNU>는 찬란한 역사를 뒤로한 채 지금은 쇠락과 침체로 묘사되는 부산대학로를 심층 취재한다. 부산대학로의 현안을 짚으며 이곳이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로 자리 잡아왔는지, 침체의 원인은 무엇인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어떤지를 시리즈 기사로 보도한다. 우선 부산대학로가 지나온 78년이 역사를 돌아봤다.
도로명 주소상 부산대학로는 △부산대학로 △부산대학로38번길 △부산대학로48번길 △부산대학로50번길 △부산대학로63번길 △부산대학로64번길 △부산대학로64번안길이다. 다만 해당 범위는 우리 대학 앞 대학가를 뜻하는 관념적 인식 속 범위와 차이가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우리 대학 학생 및 부산 시민들이 주로 인식하는 ‘관념적’ 부산대학로를 중심으로 한다. 이 범위는 우리 대학 정문부터 부산대역 사이에 걸쳐있는 30만㎡가량의 구역으로 △금정로 △장전로 △장전온천천로 등을 포함한다.
■1950’-60’: 피난 행렬부터 민주화의 바람까지
우리 대학이 1946년 개교한 지 4년 만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부산으로 모였다. 개교 70주년을 기념해 2016년 우리 대학이 발간한 <부산대학교 70년사>에 따르면, 당시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모인 예술인들은 저마다의 작품을 남기며 문화를 형성했다. 그 속에서 광복 이후 최초로 설립된 국립대학이었던 우리 대학은 지식인들의 교류가 이뤄지는 장을 형성했다.
이후 자연스레 학문과 교육의 중심이 된 우리 대학과 부산대학로는 1960년대 청년 정치의 공간으로 도약했다. 한국전쟁의 휴전 이후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독재정권에 맞서 학생들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1960년 벌어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부산 전역의 학생들이 부산대학로로 결집했다. 당시 부산대학로로 나아간 우리 대학 학생들은 학교의 개강도 막으며 민주화를 위해 분투했다(<동아일보> 1960년 6월 23일 보도).
■1970’-80’: 역사의 소용돌이, 학생 운동을 중심으로 꽃핀 대학 문화
‘7080’ 전국적으로 활발했던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부산대학로는 본격적인 청년 정치의 공간이 됐다. 군사 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들이 산발적인 데모를 이어갔고, 당시 우리 대학 학생회장이 구속되기도 했다(<매일경제> 1971년 10월 21일 보도).
특히 우리나라의 4대 민주화 운동으로 꼽히는 1979년 10.16 부마민주항쟁의 발원지 역할을 수행하며 90년대 초반까지 부산 지역 학생 운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우리 대학 학생들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교내에서의 시위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자 부산대학로로 나섰다. 당시 시위를 위해 부산대학로로 나섰던 정영수(의류학 80, 졸업) 씨는 “당시 교내에서의 시위는 학내 잠복해 있던 사복 경찰들이 많았던 탓에 5~10분 내로 정리됐다”며 “경찰을 피해 학교 앞으로 나가 시위를 이어나갔다”고 말했다.
시위와 토론을 중심으로 한 학생 운동은 당시 대학생들의 정체성과 청년 문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현재의 동아리와 비슷한 ‘서클’과 학생회가 앞장서며 학생들의 목소리가 부산대학로에 퍼졌고, 이들은 시위뿐만 아니라 △강연회 △토론회 △전시회 등 다양한 활동으로 대학 문화를 주도했다(<경향신문> 1973년 3월 29일 보도). 당시의 부산대학로를 겪었던 이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주로 지하공간에서 활동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1976년 완공된 우리 대학 신정문(現정문)을 출발점으로 늘어난 다방과 경양식 식당은 학생들에게 만남의 장소를 제공하며 청년 문화 부흥에 박차를 가했다. 1985년 부산대앞역(現부산대역)에 정차하는 부산 지하철 1호선의 개통도 지역 청년들의 교류에 일조했다. 동시에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기술이나 자격이 필요 없는 직종의 소규모 가게를 대학가에 직접 창업하는 유행이 자리 잡으며 대학생들로 번화를 이뤘다(<동아일보> 1983년 4월 15일 보도). 학생들은 또래의 가게에 방문해 유행가를 듣는 모임의 공간을 형성했다. 정 씨는 “신정문이 생기며 부산대 앞이 번화가라고 할 법하게 변했다”고 전했다.
■1990’-2000’: 청년 문화의 중심지, 우리 동네 인디밴드
부산대학로는 정치의 공간에서 자연스레 청년 문화의 공간으로 변하며 20세기의 끝자락을 풍미했다. 우리 대학 앞으로 난 큰 도로는 학생들과 청년들의 무대가 됐다. 우리 대학 정기 축제인 대동제를 비롯해 각종 동아리와 인디밴드의 공연이 열렸다. 당시 우리 대학 총학생회 문화국장을 지냈던 한 졸업생 A 씨는 “정문 앞 도로에서 차량을 막고 야외 공연 무대를 제공한 것은 당시 전국에서 문화예술 집회가 열리는 광장중 유일했을 것”이라며 “이 시기 부산대는 큰 상징성을 가졌다”고 말했다.
다양한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는 실내 클럽 무대도 번성했다. 1999년부터 부산대학로에서 인디밴드의 무대를 제공한 부산 라이브클럽의 터줏대감 ‘무몽크(現몽크)’를 비롯해 ‘인터플레이 클럽’, ‘전람회의 그림’ 등의 문화 예술 공간들이 부산대학로를 채웠다. 우리 대학을 졸업하고 무몽크 운영을 시작한 허현웅(정치외교학 86, 졸업) 씨는 “PC통신 시대가 끝나가던 2000년대는 밀레니엄의 새로운 분위기가 있었다”며 “공연을 시작하면 새벽 3~4시쯤 끝났던 2000년대는 무몽크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덕분에 1990년대 전국적인 인디 열풍 속에서 부산대학로는 인디밴드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거점이 됐다. ‘스카웨이커스’와 같이 부산대를 뿌리로 부산을 대표하는 인디밴드도 성장했다. 우리 대학 학생들 역시 인디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 인디 밴드 동아리를 형성하며 무대에 섰다. 현재까지 인터플레이와 전람회의 그림을 이어 운영하고 있는 김정섭(61세) 씨는 “2004년도 즈음 부산대 앞에선 인디밴드의 전성기가 펼쳐졌다”며 “델리스파이스, 언니네이발관, 크라잉넛처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디밴드가 인터플레이에 찾아와 공연하면 250명씩 공연을 보러왔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당시 부산대학로는 인디뿐만 아니라 힙합 문화를 선도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출발해 2000년대 힙합 신예로 떠오른 래퍼 사이먼 도미닉의 ‘사이먼 도미닉’ 가사에 나오는 ‘부대 똥다리’는 부산대역 3번 출구 아래 온천천 일대를 의미한다. 해당 구역은 당시 그래피티 문화로도 유명해 전국의 그래피티 작가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영화 <올드보이>의 촬영지 및 2006년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현재는 부산시 등 행정당국의 판단으로 대부분이 지워져 있다(<국제신문> 2010년 6월 10일 보도).
그러나 200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늘어간 상업 공간들에 대학 문화가 점차 위축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현재 우리 대학 정문에 위치한 NC백화점의 입점 논란이 대두되며 캠퍼스마저 상업화의 흐름에 휩쓸리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상업화를 목적으로 한 교내 민간 자본 유치 등의 문제도 떠올랐다. 당시 전문가들은 과도한 자본의 유입으로 대학 문화가 위축되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우리 대학 구성원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꼬집었다(<부대신문> 2011년 7월 26일 보도).
■2010’: 자본주의가 잡아먹은 대학가는 썰렁, “휴대폰 사러 옵니다”
부산대학로는 점차 획일화된 상업 공간으로 변모했다. 특히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휴대폰 판매점이 밀집한 부산대학로는 ‘휴대폰 판매의 성지’로 불렸다. 부산대역 인근 공영주차창부터 정문까지의 거리는 물론, 우리 대학 캠퍼스 안까지 자리 잡은 휴대폰 판매점은 총 95개에 달했다. 당시 황한식(경제학, 現정년퇴임) 교수는 “부산대 앞이 수요가 집중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업주들이 공급을 맞추는 현실”이라고 분석했다. 특색있는 상권과 학생들을 위한 문화 시설은 부족하다는 청년들의 지적도 이어졌다(<부대신문> 2011년 3월 5일 보도).
일부 청년 예술인들이 떠나며 인디 문화의 축소기로 접어든 부산대학로에선 지자체를 비롯한 외부단체가 청년 문화를 견인하려 움직였다. 2010년 부산대학로 상가번영회가 ‘연극의 거리’ 조성에 나서고, 대안문화단체 ‘재미난 복수’가 인디 부흥 축제인 ‘제로페스티벌’을 연 것이 대표적이다(<부대신문> 2010년 4월 27일 보도). 2012년부터는 부산 금정구청이 ‘스마트거리 사업’과 ‘청년 문화의 거리 사업’ 등을 시도했다. 당시의 청년 문화에 대해 김태형(사회학 11, 졸업) 씨는 “부산대만을 상징하는 인디와 청년 문화가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나름의 청년 문화는 있는 상황이었다”며 “거리공연, 벼룩시장 등 행사가 많았다”고 전했다.
2016년에는 부산대학로 상인회를 중심으로 한 ‘부산대학로 부흥 프로젝트’도 있었다. 특색을 잃은 대학 문화와 함께 침체한 상권의 문화적 특색을 살리기 위해 ‘PNU 해피투게더 협동조합’을 출범한 것이다. 협동조합 최주호 당시 이사장은 “문화가 피어나던 공간이 유행을 따라가기만 하는 공간으로 변해버려 안타까웠다”며 “거리의 상인들이 ‘문화를 통한 상권의 활성화’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대학로에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립 목적을 밝혔다(<부대신문> 2016년 3월 7일 보도).
그러나 대학생들이 실질적인 주인이 되어 부산대학로의 문화를 이끌기는 어려웠다. 주도권을 지닌 주체들이 모두 외부 단체였고, 당시 상업화의 흐름이 대학생들이 설 공간을 저지했다는 지적이 일었다. 특히 2012년 개업한 NC백화점은 곧바로 학생들의 정문 앞 문화 공연에 대해 소음 민원을 제기했고, 이를 기점으로 학생들의 야외 공연에 대한 제재가 가해졌다(<부대신문> 2012년 3월 16일 보도). 이에 우리 대학 학생들은 ‘위기의 대학로를 지키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항의 집회 및 공연을 열기도 했다(<부대신문> 2012년 9월 17일 보도). 2013년에도 ‘제로페스티벌’의 도로 공연에 반발하는 인근 상인들과 NC백화점의 민원으로 정문 앞 공연이 무산된 바 있다(<부대신문> 2013년 9월 17일 보도).
■2020~현재: ’부대 앞은 죽었다’, 팬데믹이 확인 사살?
코로나19 팬데믹이 훑고 간 부산대학로엔 ‘고요함’만 남았다. 2020년 코로나19로 전국적 상권 침체가 불가피해졌고, 부산대학로 역시 여파를 피할 순 없었다. △학내 행사 취소 △전면 비대면 수업 전환 △집합 금지 조치 등으로 캠퍼스는 텅 비었고 이는 곧바로 부산대학로의 문화적·상업적 침체를 가속화했다.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하는 ‘임대동향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대학 앞 소규모 상가 공실률은 2022년 기준 12.1%로 부산 평균 수치인 5%보다 두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가 점차 회복세를 보인 이후에도 부산대학로만의 대학 문화는 오리무중이다. 부산대학로를 오랫동안 봐온 이들은 명맥을 이어오던 가게들이 대부분 폐업 수순을 밟고 그 자리를 획일화된 프랜차이즈가 대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대학에서 코로나 전후를 모두 체감한 김남혁(사회학 15, 졸업) 씨는 “프랜차이즈 분점이 다수 들어오면서 ‘대학로’ 상권이 가지는 가성비 등의 매력이 없어진 것 같다”고 전했다.
일상 회복이 거의 모두 이뤄진 지금, 부산대학로 곳곳에선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을 잃었다는 불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나마 눈에 띄는 새바람으로 부산대학로 메인거리가 아닌 부산대역과 대형 아파트 단지 골목 사이에서 ‘감성 카페’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부리단길’이 꼽힌다. 청년 창업 활성화를 위한 공간도 자리 잡고 있는 추세다. 2020년 우리 대학이 개관한 창업 공간 ‘PNU AVEC’을 비롯해 지자체가 운영하는 ‘청년창조발전소 꿈터 플러스’, 각종 공유 오피스 등이다.
다만 부리단길은 200m 남짓한 소규모 거리에 불과하고, 창업 지원 공간은 대학생이 주도하는 청년문화를 형성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태형 씨는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는데 이전의 ‘젊고 활기찬 공간’이 아닌 ‘노쇠한 공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지금의 부산대 학생들에게도 부산대만의 청년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채널PNU 특별취재팀: 윤다교 부대신문 국장, 최유민 보도부장, 최선우 전 보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