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뷰파인더] "영화제 열흘 위해 한 해를 쏟아붓죠"

(8) 강소원(신문학 졸업, 89) 프로그래머 인터뷰 -신문학 학부생에서 미컴과 강사로 -"부국제 첫 해부터 매년 참여 중" -"수업 통해 폭넓은 재미 알게 되길" -"부산, 영화사적 가치가 충분한 곳"

2024-08-30     윤다교 편집국장

‘영화의 도시, 부산’이라는 대외적인 슬로건 아래, 부산에서는 영화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공적 노력은 사실 ‘촉매제’일 뿐이다. 실제로 부산 영화 산업의 탄탄한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주체는 따로 있다는 뜻이다. 바로 수도권 중심적 영화 산업 속에서 부산을 떠나지 않고, 부산과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작은 영화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대학 동문이자, 현재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에서 ‘영화론’을 강의하고 있는 강소원(신문학 졸업, 89) 부산국제영화제(부국제) 프로그래머 역시 그런 사람이다. 그는 28년 전, 부국제가 막을 올린 첫해부터 자잘한 일을 하며 부국제를 만들어 왔다고 했다. 부국제를 한 달가량 앞두고 밤을 새우며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그였지만, 영화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피곤한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채널PNU>는 지난 8월 27일 부산 영화의전당 인근 한 카페에서 ‘영화 같은 삶’이란 흔한 수식어보단 ‘영화와 같이하는 삶’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강 프로그래머를 만났다.

지난 8월 27일 영화의 전당에서 만난 강소원 프로그래머. [강소원 프로그래머 제공]

△그야말로 ‘영화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영화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한 적은 없었습니다. 신문학을 전공했다 보니 다양한 매체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영화는 그중에서 가장 재미를 느꼈던 분야인 정도였죠. 그래서 당시 학과 내의 영화 연구 분과에 들어갔는데, 갈수록 영화 공부가 재밌는 겁니다. 마침 취업 준비를 하자니, 매일 출퇴근을 해야 하는 직장생활을 할 자신도 없었던 터라 대학원에 진학해 지금 당장 재미를 느끼는 영화 공부를 조금 더 해보기로 했던 거죠. 정말 단순하게 재미있는 공부를 이어 나가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부산국제영화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시라고요.

-부국제가 처음 열린 1996년부터 한 해도 빠뜨리지 않고 함께했습니다. 관객으로 찾은 적도 많지만, 사실 첫해부터 자잘한 관련 업무를 맡았어요. 이를테면 관객과의 대화(GV)를 진행하는 사회자 역할을 한다거나, 선정작들의 짧은 소개 글을 쓰고, 특별전 안내 책자를 편집하는 등의 업무들이요. 2019년부터는 부국제를 직접 꾸리는 프로그래머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산에서 영화 공부를 하고 관련 산업에 몸담다 보니, 저에게 있어 영화라는 분야는 그야말로 부산국제영화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영화제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궁금해집니다.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컴퓨터 시스템에서 CPU(중앙처리장치)가 두뇌와 같은 역할을 하잖아요?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영화제의 CPU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단편적으로 보면 프로그래머는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를 소개할지 선정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을 보면, 영화 선정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정말 영화제 구성에 있어 모든 걸 다 해야 하더라고요(웃음). 영화를 1차적으로 심사하는 위원단을 꾸리고, 선정된 영화 등급을 정하고, 시간표를 짜고, 홍보 보도자료를 쓰는 등 영화 선정 이전부터 홍보까지의 모든 과정에 참여합니다. 심지어 초청되는 감독들의 항공편이나 숙소, 식사 메뉴까지 고민해야 하죠. 열흘 정도의 영화제 기간을 1년 동안 준비하는 셈입니다.

△부국제의 다양한 프로그램 섹션 중에서도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를 다루는 ‘와이드 앵글’ 섹션을 맡고 계시는데요. 어떻게 이 분야를 다루게 되셨나요?

-개인적인 관심사와 경험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공부를 한창 시작했던 20대 때부터 무작정 예술 영화들을 굉장히 많이 봤고,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도 일했어요. TV를 틀면 늘 해주던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새로운 영화들이 많이 신선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느끼지만요(웃음). 그렇게 꾸준히 단편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봐왔으니, 익숙하고 애정이 갈 수밖에요.

그리고 다큐멘터리만의 매력이 저와 잘 맞았어요. 영화를 많이 봐야 하는데 극 영화였으면 더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극 영화는 사실 가치 판단을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다큐멘터리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재미가 없어서 문제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가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게 되더라고요.

영화제를 준비하는 프로그래머들의 사무실. 벽 하나를 빼곡히 채운 시간표 편성 현장이다. [강소원 프로그래머 제공]

△올해 부국제부터 다큐멘터리 장르의 대중성을 위한 ‘다큐멘터리 관객상’이 신설된다고 하던데, 뿌듯하실 것 같아요.

-그렇죠. 와이드 앵글 섹션의 프로그래머를 시작할 때부터 필요하다고 생각해 온 나름의 소망이었거든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자체가 아무래도 마이너하다 보니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무겁고 진지한 장르로만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관객상을 받았다는 성과가 남으면 대중적으로 시선을 모을 수 있겠죠. 그렇게 재미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영화 배급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영화제에 굉장히 많은 영화들이 출품되잖아요. 영화를 선정하는 데 있어 어려움은 없으십니까?

-단편 영화의 경우엔 선정되기까지의 경쟁률이 무려 1:300인 경우도 있습니다. 출품되는 작품의 수가 어마어마해요. 예선심사위원들을 섭외해서 한 달 내내 회의를 하고, 추려낸 영화들을 다시 한 번 추려야 하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내 선택이 옳은지, 혹여 편견을 가지고 작품을 보진 않았는지 고민을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영화제에서 규정하는 선정 지침도 전혀 없거든요. 스스로 확신이 안 생길 때도 많아서 자기반성도 하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는 예술이고, 영화제에서만 해야 할 영화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영화, 말 그대로 도전적이고 신선한 형식의 영화들을 선정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올해 선정하신 영화 가운데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있을까요.

-아직 영화들이 공개되기 전(8월 30일 기준)이라 제목까지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올해 다큐멘터리 선정작들은 특히 학생들이 접근하기 쉬울 것 같아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1인칭 퍼스널 다큐멘터리’나 가족 및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진솔한 형태의 작품들이 많거든요.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을 촬영한 작품, 피해자로서 성범죄와 관련한 법적 투쟁을 한 과정을 스스로 촬영한 작품, 엄마·할머니와 고향을 찾아 떠나는 로드무비 형식의 작품 등이 있습니다.

이번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들 외에도, 이미 해외에서 소개된 적 있는 화제작들 역시 메인으로 소개될 겁니다. 올해는 야외극장에서 상영하는 다큐멘터리 작품도 하나 있어요. 새로운 경험이 될 테니 많은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네요.

△영화에 대한 열정이 꾸준히 강의하고 계신 ‘영화론’ 수업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부산대에서 수업을 시작한 지는 20년이 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여태 한 일들 중에 가장 지치지 않고 하고 있는 일인 것 같아요. 다른 일터에선 매일 영화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만나지만 내가 애정을 가지고 공부해 온 내용이나, 열광했던 영화를 소개할 일이 사실 많이 없거든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과정 자체가 삶의 활력이 돼요. 수업을 보다 잘하고 싶다는 게 고민이지만요.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영화에 대해 배워갔으면 하는 점이 있다면요.

-오래 수업을 해오다 보니, 과거에 비해 최근 영화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낮아졌다는 걸 체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라는 매체는 다른 예술 매체보다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어떤 영화는 삶을 변화시킬 만한 직접적 영향력을 미치기도 하죠. 그래서 제 수업은 영화 전공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 아닌 만큼, 진지하게 미학적인 가치를 이야기한다기보다는 학생들이 영화와 친밀도를 쌓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영화를 보는 재미의 폭을 넓혔으면 해요. <어벤져스> 같은 영화를 보고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잔잔하고 미니멀한 영화들을 보고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이러한 다양한 영화의 재미를 수업을 통해 느껴봤으면 좋겠어요.

△부국제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올해 부국제를 예고한다면요?

-올해 부국제는 진정한 도약을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매년 도약을 한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계속해서 지원금 축소 등으로 예산 문제를 겪었고, 지난해에도 집행위원장과 이사장의 공백 상태에서 영화제를 치르며 어려움이 있었거든요. 올해는 새로운 이사장도 부임했고, 전반적인 분위기를 심기일전하는 해인 셈이죠. 또 내년이 부국제 30주년인데, 그 도약을 보여주는 모습이 비춰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화 산업에서 부산은 어떻게 입지를 다질까요.

-우리나라는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영화 산업도 서울 중심이죠. 하지만 부산은 서울을 제외한 지역 안에서 가장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그것도 부산에서만 만들어진 영화들을 가지고 영화제를 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꾸준히요. 또, 최근에는 지면이 부족해 영화 평론가라는 이름을 유지하기가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부산에서는 영화를 평론하고 꾸준히 글을 쓰는 집단이 가시화돼 있어요. 이런 측면에서 부산은 시에서 이야기하는 거창한 영화 산업과는 별개로도 충분히 영화사적 가치를 가진 지역으로 볼만한 대목이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