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의 계절에 청년의 삶을 생각한다
10월, 하면 나는 부마민주항쟁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부마항쟁을 떠올리면 바로 청년들이 연상된다.
부마항쟁의 주역은 청년들이기 때문이다. 항쟁의 불씨를 지핀 사람들이 부산대·동아대·경남대를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이 부산과 마산의 거리로 달려 나갔을 때 그에 호응하여 함께 어깨 걸고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던 다양한 시민 연령층도 압도적 다수가 10대와 20대의 청년들이었다. 당시 경찰은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면서 시위에 참여한 청년들을 체포, 연행하여 구타하면서 조서를 꾸몄다. 그 조서에 적힌 직종들이 회사원, 공원, 상업, 잡급직, 노동, 선원, 운전수, 재수생, 무직 등이다. 이런 직업에 종사하던 청년들은 대학생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긴 시간을 작업장에서 일했다.
처지는 달랐지만 대학생도 노동청년들도 유신체제 아래서 억압된 자유와 평등, 정의를 갈구했다. 유신체제 아래서는 대통령이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할 자유, 생존권이나 사회적 평등을 요구할 권리, 분배의 정의, 공정한 법치 등은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위대한 대통령의 영도 아래 일사불란한 총화단결만 강조됐다. 장발도 미니스커트도 대중가요도 연극도 영화도 단속과 검열의 대상이었다. 감시와 밀고의 그물망이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이런 환경 아래서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허용되는 것은 이기심, 경쟁심, 출세주의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부마항쟁에 뛰어든 청년들은 달랐다. 그들은 이기심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연민과 연대, 경쟁심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 그리고 억압과 금기에 도전하는 놀라운 용기와 투혼을 보여줬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났다. 한국 사회는 놀랍도록 변했다.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은 이제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런데 청년들의 삶은 얼마나 변했는가? 나는 지금 청년들의 삶이 1970년대에 비해 크게 나아졌다고 보지 않는다. 정치적 자유는 그동안 크게 신장했는데 최근 수년 사이에 급속하게 추락했다. 평등이나 정의, 공정 등의 문제는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취업 불안이 너무 커서 청년들의 삶의 질은 크게 떨어졌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사치가 되었다는 참담한 현실이 이를 웅변한다.
가장 달라진 건 이런 문제를 바라보는 요즘 청년들의 생각이다. 부마항쟁 이후 꽤 오랫동안 청년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구조의 문제로 인식하고 집단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이런 목소리는 사라지고 개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청년들의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청년정책은 겉돌게됐다.
청년들이 나서서 역사의 물길을 바꾸었던 부마항쟁의 정신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 진원지인 부산대학교의 부마민중항쟁탑을 바라보면서 그날의 함성을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