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전당에 전쟁 조형물이 웬말” 교수도 학생도 거센 반발

[속보] 비판 현수막 잇따라 내걸려 -우리 대학, 국가보훈부와 MOU 맺고 -한국전쟁 참전 군인 명비 건립 추진 -대평, 건립 중단과 전면 재검토 요구 -대학본부 “의견 수렴 절차 마련” 수습

2025-04-17     조승완 편집국장·황주원 기자

우리 대학과 정부가 추진 중인 한국전쟁 참전군 기념비 건립을 두고 구성원들의 반발이 거세다. 교수회와 총학생회는 학문의 전당인 캠퍼스에 전쟁 관련 조형물 설치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하며 학내 의견 수렴 없는 졸속 추진을 비판했다.

지난 15일과 17일(오늘) '호국영웅 명비' 건립이 추진 중인 새벽뜰 일대에 설치된 비판 현수막. [조승완 부대신문 국장] 
국가보훈부의 ‘부산대학교 6·25참전 호국영웅 명비 제작·설치’ 제안서 평가계획 보고에 포함된 시안. [취재원 제공]

17일(오늘) 우리 대학은 박물관과 물리관 앞에 있는 새벽뜰에 가로 9m 세로 3.4m 크기의 ‘6·25 참전 호국영웅 명비(명비)’ 건립을 추진 중이다. 국가보훈부의 ‘부산대학교 6·25참전 호국영웅 명비 제작·설치’ 제안서 평가계획 보고에 따르면, 명비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되며 전쟁에 참여한 우리 대학 동문 200여 명의 이름과 우리 대학 건립에 기여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한 리차드 위트컴 장군의 얼굴이 새겨진다.

우리 대학이 국가보훈부와 호국영웅 명비 건립을 추진한 건 지난해 9월이다. 이들은 업무협약을 바탕으로 국가보훈부는 명비 건립에 필요한 사업비 9,800만 원을 지원하고, 우리 대학은 기념비가 들어설 부지와 기념비에 새겨질 동문의 학적부를 제공했다. 캠퍼스기획과 박수완 본부장은 “호국영웅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일상 속에서 보훈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며 “희생자를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추진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교수회는 지난 14일 상임이사회를 열고 △절차적 정당성 부족 △캠퍼스 상징성 훼손 △공적 검토 부족 △공간적 부적절성 등을 이유로 명비의 제작·설치는 일시 중단할 것을 대학본부에 요청했다. 이어 오늘(17일) 대학평의원회(대평)에서 건립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17일(오늘) 우리 대학 부산캠퍼스 교수회관에서 진행된 대학평의원회의 모습. [황주원 기자]

대평에 참석한 교수와 학생들은 명비가 학문의 전당인 캠퍼스의 상징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학문의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대학 공간의 정체성과 충돌할 수 있어 학내 의견 수렴 없이 전쟁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건립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우리 대학 정광식(물리학) 학과장은 “학문과 교육을 탐구하는 장소인 물리관 앞에 교육적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큰 명비를 건립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김상현(예술문화영상학 석사, 24) 대학원 총학생회장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학생의 희생을 기리는 마음은 중요하지만 (대학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명비에 기록될 200여 명의 동문에 대한 검토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 등 역사적 피해자의 기억이 배제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명비 건립 계획과 사업 제안서 등에 따르면 사업 초기 100여 명으로 추산했던 대상자는 200여 명까지 증가했다가 최종적으로 255명이 됐다. 우리 대학 교수회 관계자는 “전쟁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모호한 역사 속에서 일방적 영웅화는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사업이 필요하다면 화해와 공존을 고민할 기억의 공간 등의 방향을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날 대평에서는 명비 건립 자체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사업을 추진하는 국가보훈부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수차례 역사왜곡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정치적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대학 민주동문회 홍희철 회장은 “부산 민주화의 본산인 부산대학교에서는 충분히 좌우 갈등이 유발될 만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주윤정(사회학) 교수는 “부산대에서 조형물을 만들 때에는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정해야 한다”며 “국가가 예산을 준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우려가 존재함에도 대학이 구성원들의 의견 수렴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문제로 지목된다. 교수회는 지난 14일 대학본부에 발송한 공문에서 “충분한 논의와 공론화, 의견 수렴 없이 학내에 설치될 경우 학내 구성원 사이에 상당한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명백하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다음날 학내 의견 수렴 없는 졸속 추진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에 대학본부는 어제(16일) 오는 6월 2일 예정되어 있던 명비 제막식을 연기하고 구조물의 건립 위치를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박 본부장은 “본부에서 세 차례 열린 교수 회의에서는 지금과 같은 우려나 반발이 없었고, 특별한 이해당사자가 없는 사업이라 깊게 다루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총장 주재 회의에서 명비 건립 위치를 이전하기로 했고 디자인이나 크기 역시 바뀔 수 있다”며 “교무회의에서 오늘 제안받은 기념 대상자 조사 여부 등을 포함한 의견 수렴의 절차나 방식 등 전반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대평에서 만난 학내 구성원들은 명비 건립 사업을 두고 단순 연기가 아닌 전반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홍 회장은 “동문들의 반발이 거세다”며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취소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일경 교수회 수석부회장은 “영구 조형물을 큰 생각 없이 결정했다는 것이 유감스럽다”며 “부산대가 민주항쟁의 상징성이 있는 대학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이런 문제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수인(영어영문학, 20) 총학생회장은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고 실망스러웠다”며 “대평에서 나온 의견 중 대통령 선거 이후 사업 재검토안에 상당히 동의한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 대학에 따르면 캠퍼스 내에 호국영웅 명비를 세우는 건 국립대 중에서는 처음이다. 국가보훈부와 명비 건립 업무협약을 맺은 곳은 전국 대학 중 우리 대학과 연세대, 조선대 등 세 곳이 유일하다. 공공기관 온라인 입찰 시스템인 나라장터에 따르면 현재 연세대의 명비 사업은 유찰된 상태며, 조선대는 업체 계약을 완료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