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뷰파인더] “웹툰 성장에는 '학술'이 필요해요”

윤기헌(애니메이션전공) 교수 인터뷰 -만화와 함께하겠다는 꿈 쫓아 -부산 만화사 최초 연구자로 -산업 발전 위한 학술 연구 선도 -한국만화웹툰학회 학회장까지

2025-05-08     임승하 기자

디지털 포맷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이제 웹툰은 어엿한 하나의 문화가 됐다. 시골 소년의 "평생 만화와 함께하겠다"는 막연한 다짐은 수십 년이 지나 현실이 됐다. 만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학문적 열정을 쫓다 보니 어느새 한국 만화 연구의 선구자가 된 우리 대학 윤기헌 교수의 이야기다.

지난 5월 7일 조형관 개인 연구실에서 만난 윤기헌 교수. [조승완 부대신문 국장]
윤 교수가 내용 연구 및 자문을 맡은 '1951, 소년만화가열전'. [임승하 기자]

우리 대학 윤기헌(애니메이션전공) 교수는 지난 2월 5일 한국만화웹툰학회(학회) 제3대 학회장으로 취임했다. 윤 교수는 일본 교토세이카대에서 만화학 석사 학위를, 경북대에서 근대만화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한국 만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사다. 오랜 기간 만화를 연구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회 설립 당시 준비위원장을 맡아 학회의 기틀을 세웠고, 이후 부회장과 학술이사로 활동하며 국제 학술대회를 유치하는 등 만화 산업의 중심엔 항상 그가 있었다. <채널PNU>는 지난 4월 18일 윤 교수를 조형관 연구실에서 만나 그의 일생과 '좋은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만화를 보는 것도, 그리는 것도 좋아합니다. 어릴 때 만화를 자주 보면서 자연스럽게 좋아지게 되었고, 언젠가 죽을 때까지 만화가를 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운명 같았어요. 만화는 제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특히 만화책 읽기와 TV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오타쿠’였던 것 같아요(웃음).

△기억에 남는 만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중앙일보에서 발행한 ‘소년중앙’이라는 잡지를 특히 좋아했어요. 다양한 만화가 소개돼 계속 돌려봤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에서 ‘마징가 Z’라는 애니메이션이 수입됐을 때는 큰 충격을 받았죠. 다른 로봇 애니메이션도 많이 봤지만, 마징가 Z는 저에게 로망 그 자체였고 제 마음속에 날카롭게 들어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화가라는 길을 더 확신하게 된 계기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좋은 만화’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똑똑하지만, 유교나 도덕적 관념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요. 경직된 사회라는 거죠. 표현의 자유가 있음에도, 관념에 너무 사로잡혀서 과도한 자기검열을 거치다 보니 다양성이 부족한 것 같아요. 사회는 점점 발전하고 드라마도 대중문화로 성공을 거두고 있으니, 만화가들도 패기를 가지고 신선한 장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만화가 좋은 만화인 것 같고, 저절로 감동과 웃음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만화사 중에서도 부산의 역사를 연구하셨다고요.

-한국 현대만화는 부산을 시발점으로 한다는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에서 한국 현대만화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할 수 있죠. ‘딱지만화(군수물자에 섞여 오던 일본만화를 모작한 만화)’는 당시의 척박한 현실을 대변할 뿐 아니라, 고단한 일상 속 잠시라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였습니다. 이때 신인 작가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순수 창작만화도 양산되었고, 유통이 늘어나면서 전국적으로 발전하게 됐어요.

초창기 만화 제작을 선도했던 <산해당>과 <승리상회>, <대한문고> 등 중소 인쇄소나 출판사도 당시 동광동에 있었습니다. 당대의 청소년 신인 작가들은 한국 현대 만화의 중추세력으로 자리잡을 정도였어요. 앞으로도 부산의 만화역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부산의 콘텐츠로 자리 잡아, 지역 현대 만화사가 곧 한국 만화사의 지류이자 본류임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학회장을 맡은 한국만화웹툰학회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원래는 ‘만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학회가 없었습니다. 제가 10년 전부터 만들자고 주장해왔죠. 엔터테인먼트 분야다 보니 사람들이 학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어요. 석박사 논문도 써야 하고, 학술적으로 만화를 정의하고 싶었는데 학술적인 면모가 등한시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학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설득했어요. 사실 수많은 방해 요인이 있었지만, 10년간의 노력 끝에 학회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산업이든 학술이 뒷받침 돼야 산업도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화도 예외는 아닙니다.

△학회 설립 초기부터 오랜 시간 활동하셨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올해 학회장이 됐지만, 그전에는 4년간 학술이사 역할을 맡아 일본과 중국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만화를 전문으로 하는 학회에서 국제 학술대회를 여는 것이 꿈이었어요. 석박사들을 데려와 제대로 된 연구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도 해보고 싶었는데, 각종 세미나나 워크숍, 연구력 강화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면서 원하던 것을 다 이뤘습니다. 보람도 있었죠. ‘만화를 학술 궤도에 올리자’는 저의 목표가 점점 뚜렷해지는 것 같아요,

△학회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중점적으로 수행해야 할까요?

-최근 전국적으로 만화 관련 학과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학생 수가 줄고 있어, 비교적 기자재가 덜 필요한 만화과를 신설해 학생을 유치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학과 수가 늘어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의 열풍이 꺼지지 않고 학문적, 산업적으로 꾸준히 성장하도록 학회가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80개가 넘는 학과들을 잘 리드하고, 석박사들을 배양하며, 한국 웹툰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수 인재들을 보강하는 학회 본연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과거 2000년대 초반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 전국에 150개 학과가 생겼지만, 거품이 빠르게 꺼져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와 같아서는 안되겠죠,

△한국 만화 산업만의 강점은 무엇인가요?

-예전엔 우리나라에 만화방이 정말 많았는데, IMF 이후 다 사라졌어요. 갈 곳 없어진 만화가들이 인터넷으로 스며들어 웹툰이라는 장르를 개척하게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웹툰의 종주국입니다. 세로 스크롤의 만화 형식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급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 규모는 일본의 1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최근에는 동남아, 미국 등에 수출도 하며 긍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어 다행입니다.

△약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꼽자면 불법 웹툰 남용과 네이버 웹툰 플랫폼의 과도한 독점이 문제입니다. 일본만화는 장르가 정말 다양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로맨틱 판타지(로판), 일진물, 학원물 등이 대다수죠. 즉,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리얼리즘, 시사, 개그, 스포츠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 나와야 하는데, 독점 플랫폼이 가지는 구조적 한계로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웹툰 작가들의 작업 환경은 어떤 편인가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작가들의 노동량이 가장 많습니다. 일본 작가들은 아직도 종이에 흑백으로 그리지만, 우리는 컴퓨터로 컬러화 작업까지 해 JPG로 완성해야 하죠. 다른 나라보다 두 배 이상의 노동이 들어갑니다.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며 작업하다 보니 직업병도 생기고, 거의 중노동입니다. 그래서 저는 AI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창작자가 스토리를 개발하고, AI가 마감 처리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경제적으로 과도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작업 환경도 조성돼야 하고요. AI가 나왔다고 해서 좋은 이야기와 그림이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 오히려 더 중요해질 겁니다.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조언해주신다면요?

-다양한 소재로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학생들이 로맨스 판타지나 학원물이 아니면 진입 장벽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만화계의 기라성이라 할 수 있는 고우영이나 박기정처럼, 남들이 다 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도전해보는 것이 중요해요. 흔하지 않은 국극을 소재로 한 ‘정년이’도 최근 주목받기도 했죠. 특히 부산에서 만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부산의 특색을 살려 바다를 소재로 한 만화를 그려볼 수도 있고요. 부산의 역사, 부마민주항쟁 등을 소재로 만화를 만들어보면 어떨지도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오랜 시간 한 분야를 파고들 수 있었던 건, 만화가 제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도 있지만 제 성격 탓도 컸던 것 같습니다.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걸 계속하는 성격이거든요. 친구나 부모님처럼 가까운 사람이 반대하면 스스로에게 의심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믿고, 계속 밀고 나가라고 조언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