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현철 교수 10주기]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자 저항 정신 탐구한 학자
-총장 직선제 수호 위해 희생한 고인 -10주기 맞아 발자취 따라가 보니 -생애 전반에 학문에 대한 애정과 -삶에 녹아 든 사랑, 저항 정신 있어
우리 대학 인문관에는 총장 직선제를 수호하며 희생한 고(故) 고현철 교수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10년이나 흐른 시간 속에 학내외 구성원은 흔히 그를 ‘민주 열사’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가 살아온 궤적은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넓다. 우리 대학 동문인 고 교수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었고, 지역 문학을 살린 평론가였으며 저항 정신을 탐구한 학자였다.
지난 8월 17일 고(故) 고현철 교수 10주기를 맞아 <채널PNU>는 고 교수가 남긴 저서와 생전 그와 함께한 학자들을 만나 그의 발자취를 되짚으며 그의 삶 속에 자리한 대학 민주주의의 가치를 찾았다. 생애 전반에 걸친 사랑과 저항 정신, 학문에 대한 애정은 곧 대학 민주주의 수호로 이어졌다.
■시로 풀어낸 ‘사랑’
고 교수는 고교 학창 시절부터 시를 썼다. 문예부 활동을 통해 시를 접했고, 1980년 우리 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한 뒤 ‘부대문학회’에서 활동하며 문학적 기반을 넓혔다. 재학 시절 자작시 ‘섬’으로 부대문학상(현 부대콘텐츠상) 시 부문에서 입상했고(부대신문 1983년 1월 1일 보도), 1990년 동인지 <지평>에 6편의 시를 게재하며 시인으로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그가 시를 통해 노래한 것은 사랑이었다. 그의 고교 동문인 동길산 시인은 “고 교수는 노트 가득 사랑 시를 썼다”며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설화를 차용한 시”였다고 회고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주제를 다뤘지만 결국 그의 시는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동 시인은 “사회와 대학의 민주주의 수호 역시 그 기반이 사랑이었다”고 덧붙였다.
■부산 문학에 대한 자부심
고 교수는 시인에 그치지 않고 지역 문학의 성장을 이끈 평론가였다. 1991년 고 교수는 <오늘의 문예비평>에 글을 발표하며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구체성의 비평>과 <비평의 줏대와 잣대> 등 10권의 평론집을 남겼다. 특히 부산작가회의에서 활동하며 지역 문단 활성화를 위해 힘썼다. 동 시인은 “부산대 교수로서 문예지 기획위원이나 행사 강연 요청이 많았는데, 고 교수는 부산 문학에 대한 사명감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며 “당시 부산 문학계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학문 애정과 저항 정신
1999년부터 부산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20여 년간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50여 권의 논문과 22권의 저서를 남겼고, 인문대 발전기획위원회 위원과 국어국문학과장으로 활동하며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연구를 관통한 키워드는 ‘탈식민주의’와 ‘패러디’였다. 탈식민주의는 식민주의의 유산과 구조를 문학적으로 해체하고 비판하는 이론적·비평적 접근 방식이다. 패러디는 기존의 잘 알려진 작품을 풍자적으로 모방하는 것으로 권위적인 문학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다.
그는 <한국시의 극적 재현과 탈식민주의>, <김수영 김지하 시의 탈식민주의적 전략 비교 연구> 등을 통해 문학을 식민주의 극복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또 박사학위 논문 <한국현대시의 장르 패로디 연구-담론 양상을 중심으로>를 시작으로 신경림·서정주의 작품을 연구해 패러디를 탐구했다.
진주교대 송희복(국어교육) 교수는 “고 교수는 상층 문화나 서구 이론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소유 방식을 자주 비판했다”며 “그의 논문에 접두사 ‘탈’이나 ‘패러디’가 반복적으로 등장한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대학 민주주의의 위기와 결단
고 교수가 강의와 연구에 매진할 무렵인 2011년 당시 이명박 정부는 전국 국립대학의 총장 선출제를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학내 구성원이 선거를 통해 총장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학칙 등으로 총장임용추천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선정하겠다는 것이다. 연합뉴스(2015년 8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는 총장 직선제로 인해 대학에서 금품수수, 파벌 형성 등 폐해가 크다고 봤다. 하지만 국립대 교수들 사이에서는 간선제가 학교 운영의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저해다며 반발이 컸다. 이에 교육부는 직선제를 유지하는 대학에 재정적 불이익을 주며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대다수 국립대는 직선제를 포기했고 우리 대학도 이로 인한 혼란이 상당했다. 당시 총장이 직선제 고수 공약을 뒤집고 간선제 선정 방식으로 학칙을 변경하자, 분노한 우리 대학 교수들은 2012년 8월 29일부터 2013년 3월까지 총장실을 점거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번복 끝에 총장은 2015년 8월 4일 담화문을 내고 간선제 전환을 표명했는데, 그로부터 13일 뒤인 8월 17일 오후 고현철 교수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대학본관 국기게양대 부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교수가 대학민주화를 위해 투신하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학교와 교육계, 지역사회는 참담한 분위기였다. 송 교수는 “인품이 좋고 전혀 염세적이지 않았던 사람이었기에 충격이 컸다”고 회고했다.
■희생이 남긴 변화, 투쟁이 남긴 결실
고 교수의 죽음은 교수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우리 대학 교수진은 추모와 함께 간선제 반대 목소리를 더욱 높였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특히 2015년 9월 18일, 우리 대학을 비롯한 전국 교수진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전국교수대회를 열어 고 교수를 기리며 대학 자율성을 요구했다(부대신문 2015년 9월 21일 보도).
시간이 흘러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교수진의 요구는 정책에 반영됐다. 같은 해 8월 17일 열린 고현철 교수 2주기 추도식에서 김상곤 당시 교육부 장관은 “국립대 선출 과정에서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부대신문 2017년 8월 27일 보도). 고 교수의 희생과 교수들의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현재 고(故) 고현철 교수의 죽음은 대학 민주주의와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희생으로 기억되고 있다. 숭고한 희생은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었다. 시와 학문에 대한 사랑은 대학의 자율성을 위한 그의 결단으로, 저항 정신은 비민주적 흐름에 순응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났다. 그의 생애에 녹여 든 사랑과 학문에 대한 애정, 깊게 탐구한 저항 정신이 곧 대학 민주주의 수호라는 가치로 이어진 것이다. 그의 희생이 10년이 지나고도 영원토록 대학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