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총학선거] 40년간 '민주화 선봉'서 '축제 준비단'까지
[기획] 총학, 존재 이유를 묻다 -투표율 70%에서 후보 공백까지 -정치 투쟁→생활복지→무관심으로 -개인주의 확산 속 총학생회 위축 -구조적 한계 속 실질적 역할 모색 과제
우리 대학 개교와 함께 시작된 총학생회의 역사는 어느덧 60여 년을 넘겼다. 올해 제57대 총학생회 ‘Around Us’에 이르기까지, 학생사회의 중심축이었던 총학생회는 때로는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민주주의의 실천장이었고, 때로는 학생들의 권익을 지키는 방패였다. 부산 지역 운동권의 거점이자 부마항쟁의 진원지라는 역사 속에서 우리 대학 총학생회는 사회 변혁의 주체로서 당당히 제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총학생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복잡하다. ‘축제 준비단’ 혹은 ‘학교 행정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학교 재정 의존에 따른 보이지 않는 구조적 통제 속에서 학생자치기구로서의 독립성을 지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7일 <채널PNU>는 부대신문 보도와 <부산대학교 70년사(부대사)> 등을 참고해, 1985년 총학생회 부활 이후 각 시대 학생들이 총학에 무엇을 요구했고, 총학생회는 그 요구에 어떻게 응답해왔는지를 살펴봤다.
■학내 민주화의 선봉, 1985년 총학생회 부활
1980년대 중반, 학생들이 총학생회에 바랐던 것은 정치 권력에 맞서는 실질적인 자치였다. 학도호국단(학호단) 체제는 정부 방침에 종속된 관제 조직에 불과했기에, 학생들은 진정한 대표 기구를 요구했다. 1984년 학호단은 △총학생회·대의원회 부활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 회장의 직선제 선출을 발표하며 학호단 체제가 종식되고 1985년 5월 김대곤(조선공학과 82, 졸업) 씨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며 진정한 학생자치의 부활을 알렸다. 당시 선거는 투표율 70.16%에 달하며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다(부대신문 1985년 5월 15일 보도). 김 씨는 “당시 학생들은 민주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식을 지녔고, 이에 다시 부활한 총학도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민주 인사 초청 강연, 집회 행사 등을 준비했다”고 회상했다.
총학생회는 곧 학내 자치를 넘어 사회적 실천의 구심점이 됐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에도 학생들은 총학이 시대적 사안에 계속 목소리를 내주길 원했고, 그 기대는 전국적 조직 결성으로 이어졌다. 6월 항쟁 당시 시위 중 최루탄을 맞고 순국한 이한열 열사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전국 대학의 총학생회들은 연세대에서 회의를 가지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련)라는 중앙조직이 결성됐다. 이는 후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전환됐다(부대신문 2000년 11월 13일 보도).
1996년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김화섭(기계공학 91, 졸업) 씨는 “사회적으로 학생운동이 차지하는 위상이 높았고 거기서 부산대 총학생회가 차지하는 부분도 컸다”며 “한총련 최고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중앙상임위원회에 우리 대학 총학생회가 소속됐고, 1994년에는 우리 대학이 한총련 의장 대학을 맡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96년 당시에는 총학생회 주관 행사에 전체 학생들의 10분의 1 이상이 참석하는 등 총학생회 활동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았다”고 말했다.
■학생 요구의 확장, 정치에서 복지로
1987년 민주화 직후 학생들의 요구는 학내 민주화에서 학내 복지 보장까지 확장됐다. 이전까지는 정치 투쟁과 자치 강화가 총학의 주요 역할로 받아들여졌지만, 복지와 학사 개선 같은 실질적 문제 해결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해진 것이다. 1987년 2학기, 제19대 총학생회는 ‘학원민주화사업’을 비롯해 △등록금 인상 반대 △학생 복지(식당 개선, 학생회관 신축) △학사 문제(재수강 허용, 학사경고 폐지) △학내 민주화(교수-학생 협의회 구성, 총장 직선제) 등 생활 밀착형 의제도 함께 내걸었다. 이후 △기성회비 내역 공개 요구 집회(1989) △기성회비 인상 반대 투쟁(1991) △학내 순환버스 도입(1993)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1991~2008) △예산자치제 시행(2003~2004) 등학생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문제들이 꾸준히 제기됐다.
그 흐름은 1994년 총학생회 선거에서 뚜렷해졌다. 당시 정치색을 앞세운 후보들에 대한 비판이 일었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실질적인 변화로 연결할 수 있는 ‘실용형 총학’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부대신문 2000년 11월 13일 보도). 특히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7년, 부대신문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꼽은 총학의 역할은 ‘교육환경 개선’과 ‘학생 자치 활성화’였다. 당시 학생들은 “학생회 하면 운동권이라는 생각에 거부감이 든다”거나 “총학은 기성 정치판과 다를 바 없다”고 답했다(부대신문 1997년 11월 17일 보도).
총학은 교육 정책 대응 등 외부 문제에 계속 목소리를 냈지만, 학내 구성원의 호응은 저조했다. 1999년 총학생회는 교육부 장관의 ‘운동권 경계’ 발언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였고, 학부제 개편과 BK21 사업에 대한 비판을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외쳤지만 반응은 미미했다. 당시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서상영(국어국문학 93, 졸업) 씨는 “IMF 이후 취업이 급박해진 상황에서 교육 문제로 관심을 끌긴 어려워 지지 입장 정도에 그쳤었다”고 회고했다. 같은 해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김영미(불어불문학 95, 졸업) 씨는 “학생들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에 지쳐가는 것 같았다”며 “취업난 속 정쟁보다는 학내 복지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복지 중심으로 자리잡은 ‘생활형 총학생회’
2010년대에 들어서며 총학생회는 ‘생활형 총학생회’로 자리 잡았다. △학점이월제(2010) △성회비 반환 소송 및 등록금심의위 설치(2011) △연속 휴학 제한 폐지(2012) △천원조식(2016) 등 실질적인 복지 정책을 추진하며 학내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2010년 총학생회장 강성민(언어정보학 04, 졸업) 씨는 “당시는 총학이 복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지만, 학생들은 기본적인 학교생활 개선을 가장 원했다”며 “그에 맞춰 재수강 기준 완화, 학점이월제 등을 추진했다”고 회상했다.
사회문제와 정치활동에서 총학생회의 역할은 축소됐지만, 시도는 꾸준했다. 2012년 총학생회장은 당시 민주노동상 소속 당적으로 총학 활동을 했으며, 2016년 총학은 한대련 탈퇴 후 국공립 연석회의를 조직해 자체적인 총학 연합체를 구성했다. 2019년에는 교내에 재학 중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 후보의 자녀의 장학금과 입학 특례 의혹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총학 차원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2016년 유영현(철학 11, 졸업) 전 총학생회장은 “‘세월호 추모 콘서트’나 ‘위안부 관련 행사’처럼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총학의 활동에 공감하는 학우들도 있었지만 동시에 경계하는 시선도 분명 존재했다”고 밝혔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공감대는 옅어져 2016년은 생활과 사회 사이에서 총학이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했던 과도기였다”고 회고했다.
■개인주의 확산과 총학생회의 위축
학생사회 전반에 퍼진 개인주의적 경향은 총학생회의 위축으로도 이어졌다. IMF 이후 장기화된 취업난, 등록금 부담, 스펙 경쟁은 학생들의 관심을 ‘공공’보다 ‘생존’으로 돌려놓았다. 2012년 부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형주 한국현대사연구소 연구원은 “경제적 현실 속에서 대학생 문화 자체가 소멸하며 학생운동과 자치에 대한 참여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했다(2012년 6월 4일 보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 10여 년간 총학생회는 반복되는 △투표율 미달 △대의원회 정족 미달 △학생회비 납부율 저조 등 구조적 어려움을 겪었다. 2015년 설문조사에서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의 이름을 아느냐’는 질문에 416명 중 65.4%(272명)가 ‘둘 다 모른다’고 응답했고(부대신문 2015년 6월 1일 보도) 2017년 조사에서도 총학에 ‘관심이 있다’는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잘 모른다”고 답했다(부대신문 2017년 10월 29일 보도).
일상화된 무관심 속에서도 학생들은 불의에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2018년 12월, 당시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조한수(정치외교학 12, 졸업) 씨의 주도 하에 학생 4,321명이 넉터에 모여 비민주적인 대학 운영을 규탄하는 학생총회가 성사되기도 했다(부대신문 2018년 12월 14일 보도). 학생들은 당시 본부가 추진했던 학사 제도 개편안에 학생들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2019년 총학생회장 조한수(정치외교학 12, 졸업) 씨는 “비민주적 대학 운영에 대항하기 위한 학생총회 성사에 있어 학우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알렸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때를 정점으로 2020년대 들어 무관심은 더욱 가속화됐다. 2021년 총학 선거에서는 후보가 없어 2022년 보궐선거를 열기로 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되며 총학생회는 단과대 비대위 체제로 운영됐다(<채널PNU> 2022년 3월 14일 보도). 2022년 11월 선거에서도 비대위 출신 외엔 후보가 없었다(<채널PNU> 2022년 11월 16일 보도).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수업과 행사 축소는 학생들에게 총학생회의 존재 자체를 인식시키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2021년 보도에선 “비대면 캠퍼스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새내기로선 학생회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는 반응도 이어졌다(부대신문 2021년 12월 29일 보도).
이러한 구조적 어려움이 분명 존재하지만 학생들은 '환경 탓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총학이 인스타에 올리는 활동 중 직접 와닿는 게 없어 학생들이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지적하고 “순환버스 문제, 학생식당 이용 문제 등 학생들이 겪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이 총학의 우선적 역할”이라고 강조하는 등 학생들의 일상을 바꾸는 실질적 정책에 대한 갈증을 드러낸다. 결국 총학생회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가치와 변화를 제공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