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영호(미컴학) 교수
-49세에 늦게 여행 시작해 76개국 방문
-맛·멋·재미를 넘어서는 여행서 2권 출간
-"아는 것만큼 달리 보이는 것이 여행"
스스로에 맞는 '나만의 여행' 떠나보길"
뷰파인더(Viewfinder), 카메라에 달린 사진을 찍기 위해 피사체를 들여다보는 창을 말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미디어는 새로운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채널PNU가 기획한 ‘문창 뷰파인더’는 우보만리(牛步萬里)의 정신으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해온 이들을 주목한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우리 대학 임영호(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교수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간 학문의 길을 걸었던 임 교수는 앞으로 ‘부캐(副+Character)’였던 여행작가로 제2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50세 무렵 시작한 늦깎이 여행이 76개국 방문에 이은 새로운 직업을 안긴 셈이다. 지난 8월 18일, 9월 퇴임을 앞두고 최근 새 여행 서적 '유럽과 소비에트 변방 기행'과 '지중해에서 중세 유럽을 만나다'를 낸 그를 연구실에서 만났다.
△퇴임을 앞두고 있어 서가가 비었다.
-책을 많이 소장한다는 게 큰 의미가 없다. 원래 수만 권 가지고 있었는데, 관심이 없는 것부터 천천히 정리했다. 아마 학교에 기증한 것만 어림잡아 1만 권은 족히 될 것이다. 학술서적 200여 권 정도만 집에 있다. 커피 마시면서 읽기 좋은 미술사, 사진, 시집, 역사책이 많다. 과거에는 학문을 공부했다면, 이제는 집에 남긴 책과 함께 인생과 삶을 공부하려 한다.
△여행은 어떻게 시작했고, 여행작가를 인생 2막으로 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학교에 온 교수는 누구나 퇴직한다. 제2의 인생으로, 혹은 ‘부캐’로 뭘 할 건지 생각하다 여행을 많이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기에 여행작가로 살아보기로 결심하고 책을 내게 됐다. 사실 나는 늦깎이 여행자다. 유학 갈 때 서른이 좀 덜 되어서 비행기를 처음 타봤지만, 유학 생활 중엔 돈·시간·흥미 모두 없어서 어디 다녀본 적이 없다. 귀국해서도 학회만 다니고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49세에 처음 영국을 방문해 25일간 한 바퀴 돌면서 모든 게 시작됐다. 그렇게 시작했던 게 현재까지 76개국을 방문했다.
△어떤 여행을 추구하는가?
-나는 젊은이들과 여행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 이건 한계일 수도 있지만, 자기가 가진 경험이나 지식의 폭을 이용하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일단 좋은 점은 젊은이들처럼 단돈 1원을 아끼려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행을 하려면 네 가지가 필요하다. 시간, 돈, 체력, 흥미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모두 충족되는 시기는 평생 단 하루도 없다. 20대에는 다 있는데 돈이 없고, 30대엔 시간이, 50대가 넘어가면 체력이 없거나 체력이 있더라도 흥미가 없어진다. 편안하게 앉아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쉬는 게 좋아진다. 그래서 나는 내게 맞는 여행방식을 개발했다. 나는 여행을 빨리빨리 다니지 않는다. 밤차로 이동하거나 새벽같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침 10시 반이나 11시쯤 숙소를 나와 반나절 둘러보고, 저녁에는 시원한 곳에 앉아 야경도 보고. 남들보다 더 찬찬히 둘러본다.
△흔히 여행이라 하면 소위 ‘돈 쓰러 가서’ 말초자극적인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데 반해 교수님의 여행은 공부와 떼어놓을 수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맛있었다, 멋있었다, 재미있었다.’ 이 세 마디로 요약되는 여행서는 곤란하다. 이걸 넘어서는 여행을 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책을 썼다. 그리고 학문을 하며 생긴 습관이 하나 있다. 주어진 것을 뒤집어보고 뒤에 숨겨진 것이 무엇일까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점이다. 아름다운 고성이 있다고 하자. 보이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수백 년 전 귀족들이 배신하고 몰살당한 비극적인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걸 알고 다시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새로운 그림이 된다. 보이는 것대로만 보지 말고, 한 겹 더 벗긴 다음 보자는 이야기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
△책을 출간하셨는데,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이번에 낸 책들은 그다지 깊은 역사 이야기를 하는 책은 아니다. 주로 현지에서 걷다가 본 유적과 거기 얽힌 사연을 풀어내는 식이다.
-'유럽과 소비에트 변방 기행'은 구소련을 구성했던 조지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돌아보고 쓴 책이다. 이들은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나라다. 역사의 부침에 따라 양쪽을 옮겨 다녔지만, 지금은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벨라루스는 한 번도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적 없기에 소련 해체 이후에도 러시아에 의존적이며 ‘10월 혁명 광장’, ‘볼셰비키 거리’ 같은 지명도 그대로 남아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절의 흔적을 나치와 동일시해서 모두 지워버렸다. 소련 정부에 밀을 공출당해 수백만이 아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수도인 키이우는 2차 대전 당시 소련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영웅 도시’ 중 하나다. 그래서 이곳엔 소련 시절의 악몽을 기억하는 추모비와 소련 시절 2차대전 전몰 무명용사비가 같이 있다. 두 탑이 나란히 있는 광경이 우크라이나가 과거를 대하는 태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라는 게 딱 나눠서 이건 보존하고 이건 없앨 수 없다. 피를 나눈 동지적 부분과 악몽이 함께 남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유적과 거리, 풍경에 새겨진 역사를 풀어 공유하려 펴낸 책이다.
-'지중해에서 중세 유럽을 만나다'는 성지순례자 수호를 위해 생겨난 기사단의 명멸을 그린 책이다. 성지를 빼앗긴 기사단이 로도스섬과 몰타를 거쳐 옮겨 다닌 중세의 성채와 도시를 찾아다니며 이야기들을 품었다. 중세의 편협하고 무식한 광신도들이 만난 세계와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는 닮았다고 느꼈다. 당시 낯설고 무지한 것(이교도)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지금은 크게 달라졌을까 싶더라.
△언론학 전공이시지만, 여행 이야기에 역사가 빠지지 않는다. 역사를 좋아하시나?
-언론학도 마찬가지고, 역사, 심리, 사회, 철학은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같은 지식인으로 공부하고 결과물이 다른 것뿐이다. 중세 때까지 학문은 철학 하나뿐이지 않았나? (설명: 역사, 공학, 수학, 사회학 등 현재의 모든 학문은 철학에서 분리된 것이다. 화학 교과서에 철학자가 나오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이고, 현재에도 대부분의 박사학위가 'Ph. D.(Doctor of Philosophy)', 즉 철학박사로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기에 철학과 역사는 모든 학문에 적용되는 방법이다.
△어느 여행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글쎄, 여행을 얼마 다녀보지 않았을 때는 어디가 좋다는 식으로 추천하곤 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모든 여행은 나름대로 어두운 모습도 있고, 좋은 모습도 있다. 어느 장소가 제일 좋다기보다는 예정대로 굴러가는 일상적인 일 가운데 스냅샷처럼 들어간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다.
-한 번은 카파도키아에 혼자서 트레킹하러 갔는데 모래언덕에서 길을 잃었다. 40도가 넘는 햇빛이 내려쬐는데 내려가는 길은 없고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하늘은 노래지고 있었는데, 운 좋게 길을 내려가다 웬 사람들을 만났다. 프랑스에서 온 아가씨였는데, 시원한 곳에 가서 점심을 같이했다. 그 사람이 프랑스에 온 적이 있냐길래, 파리만 가봤다고 했더니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다’라며 파리는 프랑스에서 이례적인 곳이기에 파리를 보고 프랑스를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그러더라. 이런 소소한 스토리들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거기서 노닥거리다 시간을 착각해서 엄청나게 뛰는 바람에 고생하긴 했지만(웃음). 그런 작은 일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다만 서유럽보다는 동유럽이 조금 더 인상적인 느낌이 있다. 때가 덜 묻었다. 아르메니아 어느 산골 집에 묵고 떠날 때, 아무리 시간이 없다고 해도, 밥이 안 되면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하더라. 우리네 옛정서와 비슷하다.
△흔히 어른들이 좋아하시는 효도관광 스타일의 짜여진 여행보다는 로컬리티나 즉흥성을 중시하시는 것 같다.
-그게 없으면 여행이라고 할 수 없지! 내가 가본 76개국 가운데 단체관광으로 가본 곳이 중국밖에 없다. 근데 어디 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파리의 에펠탑도 솔직한 말로 실망스러웠다. 보통은 어느 도시에 3일 있으면, 하루는 일정표대로 느긋하게 움직이고, 나머지는 즉흥적으로 뒷골목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의외로 맛있는 식당도 있고... 이런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경험들, 스냅샷 같은 장면들이 기억에 더 남더라.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내 입맛과 맞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의외로 실수로 들어간 식당이 굉장히 맛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저도 올해 초에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처음에 기대했던 명승지보다는 중간중간에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이 더 기억에 남더라.
- 좋은 기억들은 잘 돌아오지 않는다. 2006년 연구년이라 유럽에 40일 정도 갔는데, 슬로베니아에 은퇴해서 살고 계시는 지도교수님을 뵈러 갔는데 언덕배기에서 포도 농장을 하고 계시더라. 그 집에 며칠 있었는데, 낮잠도 자고, 노인 부부 두분에서 사시니 내가 신발을 걷어붙이고 풀도 뽑아드리고, 조그마한 수영장에서 같이 수영도 하곤 했다. 저녁이 되면 영화 ‘대부’처럼 담벼락이 있는 언덕집의 동네잔치에 초대받았다. 야외에서 음악도 연주했는데, 주인이 낯선 이방인이 왔다고 와인을 부어주더라. 이후에도 가끔 사모님께서 ‘마당에 풀이 많은데, 언제 돌아오냐?’ 그러시더라. 그러다 올해는 가봐야지, 하고 연락했더니 돌아가셨더라. 그래서 두 번 가진 못했다.
-이런 기억도 있다. 교수님 부부께서 한국에도 몇 번 방문하셨는데, 내가 그 댁에 방문할 때 필요하신 건 없냐고 했더니 사모님이 옛날에 시골 할머니들이 입으시는 몸빼바지가 되게 편해 보인다고 사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국제시장에서 몸빼바지를 사서 드렸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의 일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꼭 비싼 돈을 들여 해외로 떠나야 여행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습관이나 늘 보던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여행이다. 그렇기에 누구든 자기 여건 내에서 자기만의 여행을 한 번 해볼 필요가 있다. 해외여행도 좋고, 봉사도 좋고, 전혀 해본 적 없는 일을 해보던가. 젊어선 바쁘겠지만, 이런 기회는 나이가 들수록 줄어든다.
-나는 매우 틀에 박힌 사람이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는 우유와 사과 빼고는 단 한 가지도 새로운 음식을 먹어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나라에 가도 한식을 찾지 않고, 전갈 튀김이나 애벌레 튀김도 먹는다. 나처럼 틀에 박힌 사람이 낯선 곳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여행을 떠나며 익숙한 것을 다른 관점에서 봤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라면 각자가 스스로에 맞는 ‘나만의 여행’을 꼭 한 번 떠나길 권해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