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오는 젊음의 시절이 있다. 우리는 흔히 이를 청춘(靑春)이라고 부른다. 국어사전은 청춘을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고 정의한다. 청춘은 우리에게 무언의 대상에게 맞설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감함을 부여하고 동시에 주어진 환경에 낙담하는 상심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청춘은 시간이 아니다. 세월이 흘러도 청춘은 다른 모습으로 계속된다.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폭삭 속았수다’를 인상 깊게 시청했다. ‘폭삭 속았수다’는 1950년대 제주에서 태어난 여자 주인공 애순과 남자 주인공 관식의 일생을 그려낸 드라마다. 작품 속 애순은 어렸을 때부터 ‘새침한’ 문학소녀였고, 시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적 이유로 ‘개천에서 용 난다’란 속담의 주인공이 되진 못했다. 그녀는 세 아이를 키웠고 한 아이를 잃기도 하며 부모의 무게를 짊어졌다.
내리막 인생을 걷는 것 같던 애순은 생애 끝자락에 이르러 결국 시인이 됐다. 어릴 적 문학소녀가 시인이 되는 데 강산이 수십 번 바뀌는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는 젊은 때에 시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애순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애순은 자신의 인생에서 금명·은명·동명의 엄마로, 한 사람의 아내로, 마을 도동리의 따뜻한 이웃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글자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으로 살아간다.
마침내 애순이 시절마다 또다른 청춘을 살아갈 수 있었던 데엔 남편 관식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이 있었다. 아기 부부 시절, 그는 애순이 시인이 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지켜냈다. 그렇게 시인이 된 애순의 얼굴엔 여전히 자글자글한 주름과 대비되는 소녀다움이 있다. 관식이 그의 방식으로 애순이란 꽃이 꺾이지 않도록 지지한 덕분이다. 그의 노력과 애순의 자력이 더해져, 그녀는 자신의 청춘을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서 간직했다. 이렇게 찬란히 빛나던 젊음을 지나 노인이 된 애순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우리 주변의 어른들과 겹쳐 보이며, 그들의 지나온 세월을 짐작하게 한다.
청춘엔 다양한 모양이 있다고 믿는다. 젊음의 반듯한 원형부터 세월의 무게에 구부러진 네모부터 모난 세모까지. 저마다 생김새는 다르더라도 그 안의 내용물은 청춘일 수 있다. 흰머리 희끗 날쯤 ‘오애순 시집’을 출간해 낸 그녀는 청년 시절 청춘과 중년의 청춘과는 또 다른 형태의 청춘을 채워냈다. 비록 반듯한 원형은 아니지만 말이다. 애순처럼 비록 지금 청춘의 모양이 반듯하지 않은 모양이더라도 젊음이란 원형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 청춘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모양에서 결정되는 거니까.
아직 행복할 것이 더 많이 남은, 스무 살 겨우 넘긴 ‘우리’다. 인생의 고비와 내리막길이 10년 후일지 당장 내일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가진 청춘의 모양에 좌우되지 않고 산다면 마음속 청춘은 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때 봄이 봄인 걸 알았더라면 더 찐하게 좀 살아볼걸”이라는 애순의 대사처럼, 매 순간이 새파란 봄날인 걸 알며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봄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오늘은 미세먼지 하나 없는, 핑크색 벚꽃잎이 하늘하늘 내리는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