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단 39곳·노동자 12만 명, 세탁소는 1곳
-동부산 산단 13곳은 공공 세탁소 '0'
-전국 유일 지원 조례 없어 운영난 가중
-김해·울산은 조례로 운영비 지원중
부산 기장군 소재의 한 기업에서 금속가공 생산직으로 근무하는 이 모(43, 부산 금정구) 씨의 퇴근길엔 항상 출퇴근용 가방이 아닌 또 다른 가방이 들려 있다. 이 씨가 일할 때 입은 일명 ‘작업복’이 담긴 가방이다. 이 씨는 작업복을 각종 화학물질과 중금속을 다루는 산업 현장에서 입는다고 말한다. 보기에만 더럽고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 건강에도 해로운 물질이 묻은 셈이다. 하지만 작업복을 세탁할 곳이 회사엔 없고 동네 민간 세탁소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이 씨는 일일이 작업복을 집으로 들고 간다. 이 씨는 “단독으로 손세탁을 했다가 세탁기에 넣어 세탁한다”며 “여름철엔 매일 1시간씩 빨래를 해야 해 퇴근에도 퇴근한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는 “작업복의 기름때가 세탁기에 그대로 남아 가족 건강을 해칠까 늘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14일 <채널PNU> 취재를 종합하면 부산에 있는 작업복 전용 공공 세탁소는 한곳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서부산권에만 있어 이 씨처럼 동부산권에서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은 사실상 이용이 불가하다. 인근에 있는 경남 김해와 울산광역시에 공공 세탁소가 운영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부산 노동자는 위생적인 작업복 관리에서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현재 이 씨와 같이 화학물질과 중금속을 다루는 공장이 밀집한 산업단지는 동부산권에만 13개, 614개의 사업체가 있다. 2024년 기준 1만 5,000여 명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025년 1분기 전국 산업단지 현황에 따르면 부산 전역에 산단은 39곳, 노동자는 12만 3,798명에 달한다.
■10명 중 7명 “공공 세탁소 필요”
동부산권 노동자들은 작업복 공공 세탁소가 설치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부산노동권익센터가 동부산권(기장군) 지역 노동자 564명을 대상으로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실시한 ‘공공 작업복 세탁소 수요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7.3명이 공공 작업복 세탁소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금속노조 동부산지회 박병호 지회장은 “동부산권은 산업용 세탁기 등 전문적이고 위생적으로 작업복을 세탁할 여건이 안 된다”며 “부산시와 기장군, 정부가 나서 열악한 산업단지의 노동자들을 위해서 세탁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동부산권 노동자들은 가정에서 작업복을 세탁하는 것에 불안감을 표했다. 같은 조사에서 동부산권 노동자의 80.9%(452명)가 작업복을 가정에서 세탁하며 민간 세탁소를 이용하는 노동자는 5.91%(33명)로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가정에서 작업복을 세탁하는 어려움으로 △본인 및 가족의 위생과 건강에 대한 걱정(26.9%) △위생적이고 깨끗한 세탁의 어려움(17.9%) △잔존 유해 물질에 대한 불안감(17.2%) 등을 들었다.
실제로 작업복을 가정에서 세탁한 뒤 피부병에 걸렸다는 노동자도 있다. 박 지회장에 따르면 “대부분 노동자 본인이 피부병을 앓는 호소를 많이 한다”며 “작업복을 1년에 보통 서너 벌만 주는데 가정에서 세탁하든 회사에서 제공하는 세탁기로 하든 위생적인 세탁이 힘들다 보니 작업복 자체 오염이 계속 축적돼 피부병에 많이 걸린다”고 전했다. 이어 “작업복에 묻은 기름때로 인해 피부병이 발생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지만,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 공공 작업복 세탁소 설립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민간 세탁소는 산단 노동자의 작업복을 수용할 만큼 많지 않고 작업복 세탁이 어렵단 이유로 세탁을 꺼린다. 보통 민간 세탁소에서 작업복을 세탁하려면 회사가 한 업체와 계약하는 ‘공장형 세탁소’와 노동자가 일반인과 같이 직접 작업복 세탁이 가능한지 확인한 뒤 세탁하는 ‘일반 소형 세탁소’로 나뉜다. 구군별 상공회의소 등에 따르면 대표적인 동부산권인 기장군에는 민간 세탁소는 53개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취재진이 만난 한 민간 세탁소(부산 기장군) 대표는 “작업복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세탁해도 깨끗하게 안 돼서 잘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원 조례 없는 건 부산뿐
서부산권에 있는 공공 작업복 세탁소 한 곳마저 운영이 녹록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 7월 3일 국제신문 보도에 따르면 강서구지역자활센터가 부산조선해양기자재공업협동조합으로부터 위탁받아 운영 중인 ‘동백일터클리닝’은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운영비를 국비로 충당하지만 대부분 인건비에 쓰이고 기름때로 인한 부품 고장으로 인한 수리비와 임대료 부담 등이 크다. 부산노동권익센터 김희경 정책연구부 부장은 “현재 운영하는 동백일터클리닝은 운영비 지원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다”며 “세탁기가 고장이라도 나면 수리비를 세탁소가 자체 부담해야 하는 구조”라고 전했다.
경영상 어려움이 드러나자 지난 11월 5일 BNK부산은행이 ‘동백일터클리닝’의 운영 지원에 나섰다. 부산은행은 세탁소 명칭을 ‘BNK부산은행과 함께하는 동백일터클리닝’으로 변경하고, 향후 세탁소가 자립 운영이 가능하도록 연간 임대료, 설비 유지보수, 근로자 근무 환경 개선비 등을 지원할 예정임을 밝혔다. 그러나 이번 지원은 단기적인 조치일 뿐 근본적인 운영의 해결 방안은 여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이러한 부산시의 현황은 타시도와 비교해도 열악하다. 전국에서 부산시만 지원 조례 없이 공공 작업복 세탁소인 동백일터클리닝을 운영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노동권익센터에 따르면 전국에서 공공 작업복 세탁소 지원 조례를 제정한 지자체는 27곳, 실제로 공공 작업복 세탁소가 있는 곳은 17곳인데 이 가운데 공공 작업복 세탁소가 있으면서도 조례가 없는 곳은 부산이 유일하다.
부산과 가까운 경남 김해시와 울산광역시 남구에는 공공 작업복 세탁소 지원 조례가 있고 세탁소도 있다. 김해시에는 2019년 설립된 공공 작업복 세탁소인 ‘김해 가야클리닝’이 있다. 이곳은 경상남도와 김해시,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경총(경남경영자총협회), 지역자활센터 등 민관 협력으로 운영을 시작한 뒤 4개 산단에서 31곳의 기업의 작업복을 세탁하고 있다. 울산시 남구에 2021년 개소한 ‘울산 태화강클리닝’은 울산시와 울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 울산광역자활센터 등과 업무협약을 맺고 운영 중이다. 이들은 화재·구조 현장에서 입는 특수 방화복 세탁으로 범위를 넓혀 노동자의 건강과 세탁 편의를 보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전라남도 여수와 광주광역시의 경우 공공 작업복 세탁소 관련 조례를 제정해 1억 6,000만 원과 1억 원의 연간 운영비를 지원했다. 전라북도와 경기도 인천시는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설치 및 운영 지원 조례’를 각각 2023년과 올해 제정했다. 이에 대해 부산노동권익센터는 “부산시에 관련 지원 조례 제정이 시급하다”며 “이를 통해 한 곳에 불과한 서부산권의 공공 작업복 세탁소 운영의 어려움을 덜고 동부산권에도 세탁소가 생겨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정치권 “부산시 적극 나서야”
시민사회와 정치권도 부산시가 공공 작업복 세탁소 설립과 운영 지원에 있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금속노조 동부산지회 박병호 지회장은 “부산시장이 의지를 가지고 부산시 차원에서 세탁소 설립에 대해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며 “부산시 의회에서도 동부산권에 없는 작업복 세탁소 설치 조례를 제정하고 지역의 노동부, 기업주 협회 등이 같이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시의회 반선호(더불어민주당 비례) 의원은 취재진에게 “공공 작업복 세탁소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산업 안전 인프라로서 의미가 있다”며 “작업복 세탁소의 설치와 운영을 위한 제도적 근거를 마련해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인 운영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부산시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취재진의 질의에 부산시 일자리노동과는 “현재 작업복 세탁소 설치의 필요성에 대해 시에서도 적극 공감해 다방면으로 정부와 고민하고 있다”며 “현재 정부의 정책 기조를 볼 때 노동에 관심이 많은 만큼 향후 바람직한 노동 정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채널PNU 특별취재팀 : 임현규 영상제작팀 전문기자, 송채은 방송뉴스팀 제작부장, 김성린 방송뉴스팀 정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