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영화의 정념과 현재의 실종
‘하이재킹’(2024)과 ‘행복의 나라’(2024)를 연이어 만나면서 피로를 느꼈다. 어디에선가 먼저 본 것만 같은, 무척이나 익숙한 기시감의 영화들. 이 리스트에 다른 영화를 더하더라도 전혀 어색함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들은 ‘변호인’(2013)과 ‘1987’(2017), ‘택시운전사’(2017)나 ‘서울의 봄’(2023)과 같이 군사정권 치하의 역사를 극화한 한국 상업영화의 계보에 몇 줄을 더 하는데 그칠 따름이다.
단언컨대 이 영화들을 붙잡고 일일이 비평적 시선의 현미경을 들이대는 건 별 의미 없는 작업일 것이다. 한국 상업영화가 창조적 활력을 잃은 채 성공한 과거의 사례를 공식화하고는, 기성의 서사 모델과 묘사의 표준에 기대어 안주하고 있다는 관성의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으며 과거를 복기하는 일은 중요하다는 교훈조의 언어로 반박할지 모르겠으나, 스릴러가 되었든, 법정 공방의 드라마가 되었든, 역사를 장르 영화의 서사적 규칙에 맞도록 해체하고 가공한 대체역사에 두고 운운하는 건 넌센스이지 않을까?
근현대사의 시공을 무대로 삼은 이상의 영화들은 그 내용 자체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기획을 불러온 대중의 증상을 비추는 리트머스 시험지의 성격을 갖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하이재킹’은 실제 사건의 테러범 김상태를 김용대(여진구)로 각색하면서 억울하게 사상범으로 몰린 탓에 비극을 겪은 시대의 희생양이라는 모종의 알리바이를 부여하고, ‘행복의 나라’에서 변호인 정인후(조정석)는 전두환을 모티브 삼아 이름을 비튼 전상두 합동수사단장에게 무릎을 꿇고는 선처를 호소한다.
이 시대를 다룬 영화들에 공통적으로 깔린 정념은 부당한 권력과 선량한 피지배층, 정의로운 민중이라는 식의 편리하고도 납작한 선악의 이분법이며, 그 결과는 기성의 통념에 안전하게 영합해 관객의 피해의식을 만족시키려는 앙상한 피해자 서사의 답습일 따름이다. 주의할 건 대중의 정념을 거스르는 이런 지적과 비판이 역사수정주의를 옹호하는 걸로 오인되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단지 기성의 서사적 표준과 감정의 도식을 벗어나, 역사현실과 인간을 바라봄에 있어 시선에 일말의 담백함, 냉정한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려스러운 점은 날이 갈수록 주류 상업영화에서 현재라는 시간의 지평이 지워져 간다는 사실이다. ‘써니’(2011)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빅토리’(2024)도 시간대가 다를 뿐, 이제는 기성세대가 된 중장년층 관객의 청춘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향수를 겨냥하고 있다. 지금 다수가 겪는, 한국적 삶의 당대적 리얼리티가 영화에서 ‘추방‘되어 있는 건, 그것이 섣부르게 극화해 오락으로 소모될 수 없는 너무나도 불편한 현실이기에,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현재 한국영화는 과거와 현재의 시제로 양극화되어 있다. 추방된 현실의 어둡고 불편한 그림자는 ‘울산의 별’(2024) 같은 결기에 찬 독립영화에서나 애써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상업영화는 신기루처럼 아스라한 과거에 천착한 나머지 ‘실재의 사막’이 되어간다. 무너지는 현재를 외면한 채 과거와 낭만, 또는 ‘파일럿’(2024)과 같은 유치찬란한 유희로 향하며 상처를 봉합하는데 급급한 한국영화 일각의 흐름이 실로 근심스러울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