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45주년인 지난 10월 16일, 우리 대학 학생들과 동문들은 관련 기념행사가 전무하단 소식(<채널PNU> 2024년 10월 4일 보도)을 아쉬워했다. 부마민주항쟁 발원지인 우리 대학은 지난해 학내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압도적 찬성 여론을 얻어 10월 16일을 우리 대학 기념일을 지정했다. 개교기념일 이외에 생긴 첫 학교 기념일이 무색하진 셈이다.

<채널PNU>는 부마민주항쟁 45주년을 기념해 우리 대학 선배들이 학내 시위 이후 나선 거리를 따라갔다. 시위대의 이동 경로는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발간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보고서)’를 토대로 파악했다. 시위대와 경찰 진압대가 큰 충돌을 벌였던 △부산캠퍼스 정문 △온천장 △동래경찰서 △부산교육대학교를 현시대 사진으로 담았다.

당시 우리 대학 부산캠퍼스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미남로터리 및 부산교대에 이르기까지의 운동 과정을 표한한 지도. [출처: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당시 우리 대학 부산캠퍼스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미남로터리 및 부산교대에 이르기까지의 운동 과정을 표한한 지도. [출처: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부산대학교 정문과 온천장

보고서에 따르면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우리 대학 학생들은 최루탄이 날아드는 와중에도 끝내 캠퍼스를 벗어나 미남로터리까지 행진했다. 1979년 10월 16일 새벽벌도서관 앞에 집결한 시위대 1진은 구 정문의 자물쇠를 깨트리고 1,000여 명 가량의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다. 구 정문 앞 사거리에서 학생들은 진압대와 충돌했고 400여 명 가량이 금정초등학교 및 금강식물원으로 진출했다. 이 틈을 타 시위대 2진 약 1,000여 명은 당시 정문과 연결되어 있던 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의 담장을 무너뜨리고 온천장으로 향했다.

시위대의 진출을 막기 위해 당시 경찰기동대 585명은 구 정문과 신 정문을 봉쇄했다. (c) 조승완 전문기자
시위대의 진출을 막기 위해 당시 경찰기동대 585명은 구 정문과 신 정문을 봉쇄했다. (c) 조승완 전문기자

 

​당시 온천장을 지나던 시위대의 사진.  온천장은 우리 대학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진압대를 벗어나 첫번째로 진출한 장소다. (c) 조승완 전문기자
​당시 온천장을 지나던 시위대의 사진.  온천장은 우리 대학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진압대를 벗어나 첫번째로 진출한 장소다. (c) 조승완 전문기자

 

동래경찰서

온천장에서 시위대는 다시 한 번 진압대와 충돌한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크게 흩어졌고 학생들은 온천교를 횡단하여 명륜동으로 향했다. 이후 시위대 3진과 합류하여 동래 경찰서를 지나 부산교육대학교로 나아갔다. 시위대의 최종 목표는 미남 로터리와 부산교대를 통해 도심으로 나가는 것이었기에 부산교대 앞은 이미 진압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온천장은 흩어졌던 시위대가 사직 및 명륜으로 나아가기위해선 필수적으로 지나야했던 핵심 거점이었다.

온천장에서 진압대와 충돌한 후 동선을 변경해 동래경찰서를 지나는 시위대의 모습. (c) 조승완 전문기자
온천장에서 진압대와 충돌한 후 동선을 변경해 동래경찰서를 지나는 시위대의 모습. (c) 조승완 전문기자

부산교육대학교

부산교대 앞 삼거리에는 동부경찰서의 기동대가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기동대는 도로를 차단하고 육교에서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대의 도심 진출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시위대는 가두시위를 포기한다. 이후 시위대는 ‘14시 부산역 집결’을 전파하고 도심에서 재집결하기로 결정한다. 우리 대학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는 학생들로 가득 찼고 재집결한 학생들은 부산시청과 남포동에서 도심 시위를 이어가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시위는 경남 마산으로 번졌고 열흘 만에 10·26이 일어나 유신 체제가 막을 내렸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정권 붕괴를 앞당긴 시민 항쟁이란 평가 속에 2019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미남 로터리와 함께 가장 치열한 충돌 장소였던 부산교육대학교 앞. 시위대는 이 충돌 이후 도심 내에서 다시 모일 것을 결정한다. (c) 조승완 전문기자
미남 로터리와 함께 가장 치열한 충돌 장소였던 부산교육대학교 앞. 시위대는 이 충돌 이후 도심 내에서 다시 모일 것을 결정한다. (c) 조승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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