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가 학점포기제 속속 도입
-대학 교육 본질 흐린다는 우려 속에
-수도권-지역대 간 학점 격차 커지고
-학점 인플레이션 심화 위험성 높아

서울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취득학점 포기제(학점 포기제)’가 10여 년 만에 부활하며 논란이 뜨겁다. 우리 대학 학생들 사이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벌어진 수도권과 지역 대학 간의 ‘학점 격차’가 더 커질 것이란 불만 섞인 우려가 나온다.

6일 <채널PNU> 취재를 종합하면 고려대가 필수 전공을 제외하고 최대 6학점까지 성적을 삭제할 수 있는 학점 포기제를 지난 3월 도입한 데 이어 한양대도 다음해부터 학점 포기제를 시행한다.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총학생회가 학점 포기제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어 대학본부에 요구안을 전달한 상태다. 학점 포기제는 수업을 다시 들어 학점을 갱신하는 ‘재수강 제도’와 달리 취득한 학점을 없애는 것으로 ‘학점 지우개’로도 불린다.

서울권 대학을 중심으로 학점 포기제에 대한 논의가 부활하고 있다. (c) 박건희 기자
서울권 대학을 중심으로 학점 포기제에 대한 논의가 부활하고 있다. (c) 박건희 기자
대학알리미에 공개된 '전공과목 성적 분포(대학)'를 보면 서울 소재 대학은 상위 10개대와 국가거점국립대학의 A학점 취득율 간 격차가 상당하다. (c)황주원 기자
대학알리미에 공개된 '전공과목 성적 분포'를 보면 서울 소재 상위 10개 대학과 국가거점국립대학의 A학점 취득율 간 격차가 상당하다. (c)황주원 기자

우리 대학 학생들은 이 같은 소식에 학점 인플레이션을 우려한다. 지난해 우리 대학은 재수강 시 취득 가능 학점을 B+에서 A0로 올리고, 올해는 학점의 백분위 변환점수 개정을 시도하는 등 잇따른 서울 주요 대학의 학점 올리기에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학점 포기제에 대한 논의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우리 대학 재학생 A(토목공학, 21) 씨는 “학점 포기제 시행 전에도 학점은 취업과 진학에 중요한 요소였는데, 낮은 학점을 지우면 ‘학점 인플레이션’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더욱 높은 학점이 우대받을 것이다”고 말했다.

학점이 당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대학원 입시에서 학점 인플레이션은 민감한 문제다. 우리 대학 재학생 송유온(인지메카트로닉스공학 박사, 24) 씨는 “타 대학교의 대학원을 진학할 때 높은 학점이 기본 합격선으로 작용할 정도로 큰 역할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려대는 학점 포기제가 최근 대학 학사 자율화 분위기에 따른 것으로 학점 인플레이션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고려대 학사과는 “학사 유연화 정책을 통해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쪽으로 대학 교육 정책 기조가 변화하고 있다”며 “전공 자율화의 하나로 학점 포기를 통해 다양한 전공의 탐색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학점 포기의 범위와 신청 횟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고 밝혔다. 고려대 재학생 B(경영대학, 20) 씨는 “학점 포기제가 도입됐을 땐 학생들이 반겼지만 정작 졸업용 성적표에 학점을 지운 흔적이 남는다는 소식에 주위에서도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서울 주요 대학의 학점 포기제 도입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벌어진 지역과 수도권 대학 간 학점 격차를 심화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대학 알리미에 공시된 ‘2023 대학별 전공과목 성적 분포’에 따르면 이미 서울권 대학과 지방 대학 간 학점 비율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학생 중 A학점 비율이 높은 곳은 △이화여대(60.3%) △연세대(57.5%) △고려대(56.1%) △성균관대(55.9%)로 서울권 대학인 반면, 거점국립대의 경우 △부산대(40.5%) △제주대(36.9%) △전남대(35.1%) △충북대(35.1%) △경북대(33.4%)에 불과했다.경북대와 이화여대를 비교하면 A학점 비율에서 2배에 가까운 격차를 보인 것이다.

이 같은 지역과 수도권 대학 간 학점 격차는 그간 대부분 대학이 ‘상대 평가’를 운영하다, 최근 몇 년간 서울권 대학이 상대평가 제한을 완화하거나 절대 평가를 도입해 A 학점을 받을 수 있는 비율을 늘려온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온라인 강의에 한해 절대 평가를 허용하는 수업이 늘어나며 격차는 더욱 커져 왔다.

학점 포기제는 대학 교육의 본질을 해친다는 비판도 받는다. 경북대는 학사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재이수 제도가 학점 포기제에 비해 바람직하다며 △수업 불충실 및 수강 질서 문란 △상대평가제 시행 취지 퇴색 △교수 평가 권위 상실 △대학 위상 절하 등의 이유로 학점 포기제를 시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양대 박주호(교육학) 교수도 “올바른 학문 발전과 연구 경쟁력을 위해 성과 측정 및 평가는 엄정해야 한다”며 “학점 포기제의 운영은 학문 선진화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교육부도 학점 포기제 도입을 우려한 바 있다. 당초 2013년까지 늘어나던 학점 포기제가 2014년 대학가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교육부와 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이 각 대학에 ‘학생 성적 관리 개선 방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취업용 성적표’가 무분별하게 발급되는 일을 막기 위해 교육부는 2014년 말 발표한 대학구조개혁 평가에서 ‘성적 분포 적절성’을 재정지원제한 대학 선정 기준으로 내세웠다. 현재 해당 지표는 삭제됐지만, 당시 정부 평가를 의식했던 지역 대학들의 관행이 아직 학점 관리 규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기업 채용 담당자들은 취업 준비생들이 학점 인플레이션을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한다. 일정 수준의 학점만 충족한다면 학점 외에 직무 경험 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CJ 올리브네트웍스 채용 관계자는 “학점이 성실함과 학업 생활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기에일정 수준은 넘어야 한다”면서도 “대회, 학회 등 관심 직무에 대한 역량 개발을 통해 타 지원자와의 차별성을 갖는 게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부산 패션전문기업 세정의 김정훈 이사도 “(학점이)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며 “학점이 낮다면 반대급부로 학점을 상쇄할 공모전이나 경험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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