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다시 한 번 전쟁과 억압,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타자화 등 트라우마와 그 여파를 대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더 건강하고 행복하며 포용적인 세상을 위해 기도한다고 믿습니다. 과거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은 증오를 방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옳은 것을 위해 싸우고, 계속 웃으며, 서로 사랑하고, 함께 재건합시다. 감사합니다.”
<브루탈리스트>(2024)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수상소감을 밝히는 순간을 보면서,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일련의 작가주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공통된 병리(病理)에 대한 무의식적인 고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휴머니즘의 메시지에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건, 예술의 세계에서는 선한 의도를 갖고 만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로만 이어지는 건 아니며, 담고자한 메시지가 만듦새의 결함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될 수는 없음을 지적하려 할 따름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가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다룬 전반부에는 가공의 이야기임에도 실화처럼 받아들여지는 전기 영화의 무난한 실감이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극은 다양한 서브플롯의 난립으로 초점을 잃은 채 무너지고 만다. 일단 영화에는 배우가 언급한 것 이상의 주제와 요소들이 과포화이다시피 들어있다. 타 인종과 이민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사회적 계급의 차이, 전후와 냉전기의 사회상 등등. 그러나 이를 설명하는 개별 장면들은 충분한 복선이 제시되지 않아 다른 장면과 서사상의 유기적 연결성을 갖지 못한 채 던져지면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의미 부여가 이뤄지지 못한 단편적 인상으로 소모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의 영광을 안았다.
염려스러운 건 비슷한 유의 영화들, 다시 말해 현대의 민감한 이슈를 소재로 삼는다고 선언하되, 그에 걸맞은 심도를 부여하지 않고 단지 나열하고 전시하는 것만으로 작가주의인양 포즈를 취하는 영화들이 비평의 찬사를 받는 경향이 어느 순간부터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켄슈타인’을 여성 버전으로 뒤집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2023)이나 호화여객선을 블랙코미디의 무대로 삼은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2022)을 보자. 두 영화의 깊이는 감독들의 전작이 각각 <더 페이버릿>(2018)과 <더 스퀘어>(2017)였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부실하고 빈곤하다. 젠더 이슈와 사회계급의 차이를 전면에 내세우며 전복과 도발의 포즈를 취하지만, 이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세지로 엮는 통찰의 일리(一理)에 이르지 못하기에 종국에 가서는 공허해지고 만다.
겉핥기 수준이지만 특정한 사회적 이슈, 의제를 다룬다는 선언과 포즈만 있다면 비평계의 높은 평가와 환대를 받고, 서사의 구조적 결함, 미적 형식의 합목적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창작자는 게으른 결과를 내지만 비평은 위험성을 지적하지 않은 채 당대의 유행을 좆는데 급급해하며 손쉽게 열광한다. 안타깝게도 봉준호 마저도 <미키 17>(2025)로 동일한 함정에 빠져버린 모양이다. 우리 시대 문화의 퇴보가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