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PNU 부마민주항쟁 기획
-1960~2000년대 학생운동 역사
-중심적 역할을 했던 6인 인터뷰
-치열한 투쟁의 원동력 전해

민주화의 물결로 요동치던 부산의 중심에는 언제나 대학생이 있었다. 각종 사회 변화 속에서 대학생들은 자신을 둘러싼 문제를 바로잡고자 교정과 길거리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섰다. 그러나 뜨거웠던 ‘학생운동’은 이제 옛이야기가 됐다. 역사가 된 피 끓는 투쟁과 숭고한 정신은 빛바랜 유물로 남았다.

<채널PNU>는 올해 45주년을 맞은 부마민주항쟁을 기념하며 1960년대~2000년대 학생들이 사회를 향해 꾸준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취재했다. △송기인 신부 △정광민(경제학 78, 졸업) 10·16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김종기(철학 81, 졸업)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종삼(조선해양공학 84, 졸업) 한의사 △노정현(경영학 96, 졸업) 진보당 부산광역시당위원장 △임봉(한문학 97, 졸업) 완월기록연구소 사무국장 등 시대별 부산 학생운동 역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6명의 인물을 만났다. 인터뷰는 지난 9월 13일부터 27일 사이 각 인터뷰이의 자택과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부산 학생운동 역사의 주역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1960년대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인 송기인 신부 △1979년 부마항쟁 당시 폐정 개혁 요구 선언문을 배포한 정광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6월 항쟁 당시 우리 대학 총학생회장을 맡은 김종삼 한의사 △6월항쟁에 앞장섰던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김종기 상임이사 △2000년 학내 여성 운동을 이끌었던 완월기록연구소 임봉 사무국장 △IMF 이후 학생 사회 참여를 주도한 진보당 부산시당 노정현 위원장. [정수빈 기자·채널PNU DB·취재원 제공 등]
부산 학생운동 역사의 주역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1960년대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인 송기인 신부 △1979년 부마항쟁 당시 폐정 개혁 요구 선언문을 배포한 정광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6월 항쟁 당시 우리 대학 총학생회장을 맡은 김종삼 한의사 △6월항쟁에 앞장섰던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김종기 상임이사 △2000년 학내 여성 운동을 이끌었던 완월기록연구소 임봉 사무국장 △IMF 이후 학생 사회 참여를 주도한 진보당 부산시당 노정현 위원장. [정수빈 기자·채널PNU DB·취재원 제공 등]

■1960년대: 민주적 움직임의 태동

1960년 4월 19일 오전 10시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반발하며 전국 학생이 봉기했다. 우리 대학이 발간한 ‘부산대학교 70년사’에 따르면 우리 대학은 당시 정부 주도로 결성된 학도호국단의 방해로 4월 19일 시위에 참여하진 못했으나 4월 26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20만 명의 부산 시민과 함께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같은 날 오후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야를 결정했다.

전국이 동시에 시위를 벌일 만큼 거대한 사건의 배경에는 당시 정권의 부정함에 대한 공통된 문제의식이 있었다. 4월 혁명의 가운데서 민주화 운동의 오랜 역사를 함께하며 ‘부산 민주화운동계의 대부’로 꼽히는 송기인 신부는 4월 혁명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축적된 힘’에 있다고 얘기했다. 그는 “60년대 사회는 숨을 마음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한 시절인 걸 (당시에 있던) 모두가 느꼈고 사람들도 많이 잡혀갔다”며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쌓여서 터질 준비가 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한번 터져 나온 분노가 끊임없이 이어진 데에는 당시 대학생들의 ‘자기희생’이 있었다. 수십 번 감옥에 잡혀가면서도 개인이 아닌 전체를 고민했던 청년들은 사회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싸웠다. 송 신부는 “나라가 이 꼴인데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투쟁했던 학생도 있었다”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손해를 전혀 안 보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일이) 잘 되길 바라면 사회가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70년대: 부산서 타오른 민주주의 불꽃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계기를 마련한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오전 9시 53분 우리 대학 제1사범관(옛 인문사회관)에서 시작됐다. 21세였던 정광민 10·16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은 학과 수업을 기다리던 학생들에게 유신철폐를 촉구하는 ‘선언문'을 배포했다. 선언문에 따라 건설관(옛 도서관) 앞에 모여든 학생들은 학교 담장을 넘어 부산 시내로 가두시위를 이어 나갔고, 항쟁은 마산까지 번져 나갔다.

시위를 하다 검거될 경우 구속되거나 전과자라는 딱지가 붙는 상황 속에서 학생들을 움직였던 것은 ‘정의감’에서 비롯된 희생과 결단이었다고 정광민 회장은 전했다.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학생을 잡아 가두고 제적시키며 학교를 군대로 만드는 정부와 경찰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선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 회장은 “자유 민주 국가에서 자유와 민주를 찾아볼 수 없었고 탄압이 눈에 보일 정도로 극명하게 드러나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현 상황이) 심각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이었다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에 문제 인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결단,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하겠다는 희생을 각오했다”고 기억했다.

정 회장은 요즘의 학생들이 달라진 환경 속에서도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을 둘러싼 여건이 1970년대와는 상당히 달라졌지만 다수가 느끼는 사회 속 불공정을 해결하려면 사회와 자신을 이루는 관계를 돌아봐야 한다고도 전했다. 그는 “지금 학생들은 공정함에 대한 갈망을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한 사람이 고립된 개인으로서만 살아갈 수 없기에 사회적 관계 속에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1980년대: 민주 항쟁의 분화구, 부산

우리 대학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막을 내리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낸 6월 항쟁의 중심에 있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인 29일까지 우리 대학 학생들을 주축으로 부산에선 매일같이 시위가 이어졌다. 당시 19대 총학생회장을 맡아 투쟁의 일선에서 학생들을 이끌었던 김종삼 한의사는 “수천 사람을 학살한 사람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비정상적인 사회 속 탄압이 심해지니 투쟁도 격렬했다”고 얘기했다.

김종삼 씨는 부산에서 격렬하게 펼쳐진 6월 항쟁엔 앞선 투쟁에서 승리했던 ‘경험’이 기폭제가 됐다고 전했다. 부마민주항쟁을 통해 대규모의 항쟁을 벌였던 경험과 1987년 3월부터 부산대 언론사 <부대신문>에 대한 언론 탄압에서 비롯된 학원 민주화 투쟁의 승리 경험이 6월 항쟁까지 이어졌다.

동료들의 희생에 대한 ‘분노’와 대학생 간의 ‘연대의식’도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전국을 분노에 빠트렸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1월 14일) △황보영국 열사 분신(5월 17일) △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6월 9일) △이태춘 열사 최루탄 직격 사건(6월 18일)에서 비롯된 학생들의 분노와 연대 의식은 항쟁의 연결고리가 됐다. 김 씨는 “선후배 학생들의 투쟁과 박종철 열사와 같은 인물들의 희생에 더 미친 듯이 싸울 수밖에 없었고 개인적으로는 죽을 각오로 임했다”고 전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시대에 맞선 김 씨와 당시 부총학생회장으로서 함께했던 김종기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상임이사는 함께 만드는 미래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종기 상임이사는 “1년 내내 수배를 달고 있어 집에 못 들어가고 쫓기니 두렵긴 했어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6월 항쟁의 정신이 가장 잘 살아있는 곳이 부산이고 그 정신의 핵심은 대학생”이라며 “지금 힘들더라도 내 어려움이 혼자만의 어려움이 아닌 사회 전체의 어려움이라는 생각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이어 “옆의 친구에게 고개 돌려 손을 잡는 배려와 연대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1990년대, 2000년대: 학생운동의 마지막 전성기를 바라보며

격렬했던 민주화 운동이 성과를 거둔 뒤 공통된 문제의식이 사라진 상황에서 사회 참여의 에너지는 각계각층에 만들어진 대중 단체에 전해졌다. 학생운동의 열기는 줄었지만 조직 차원의 각 영역에서 학생들은 사회 변화를 위해 저마다의 활동을 이어갔다.

1985년부터 2003년까지 우리 대학에 있었던 총여학생회는 당시 학내에서 여성 운동을 전개하는 유일한 기구였다. 특히 성폭력을 당해 고통 받는 학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을 대신해 냈던 목소리는 작지만 강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2000년 총여학생회의 부회장이었던 임봉 완월기록연구소 사무국장에 따르면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우리 대학엔 1998년 9월 전국 최초로 ‘성폭력 규제 학칙’이 만들어졌다. 그는 “성폭력을 저지른 강사를 내쫓고 (이를 방지하고 처벌하기 위한) 반 성폭력 학칙을 제정하기 위해 1997년부터 집중적인 활동을 이어갔다”고 전했다.

임봉 사무국장은 “대학에서 여성 운동은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소수 인원이 늘 힘들게 해왔다”면서도 “성폭력 피해자들이 낸 용기를 떠올렸기에 욕을 먹더라도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우리가 아니면 안된다, 우린 잘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활동에) 임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이뤄낸 것들을 보며) 비록 소수지만 옳은 일을 하고 있고 이 일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원동력이 됐다”고 전했다.

격변하는 사회에서 학생 참여가 줄어든 2000년 이후에도 사회 문제 해결과 정의로운 사회를 열망하는 학생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93년 문민정부 등장 △1996년 한국대학총학생연합회(한총련) 이적단체 규정 △1997년 IMF가 학생사회 참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낳았지만 동료와 힘을 모아 목소리를 내는 과정 자체가 사회 변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던 것이다.

우리 대학 32대 부총학생회장을 지낸 진보당 노정현 부산광역시당 위원장은 “예전엔 (학생 사회 참여가) 조금의 수고로움이었다면 IMF 이후로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져 자신의 사회 진출에 방해가 되는 요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얘기하면서도 “(제 경우에도) 사회 참여 자체로 효능감이 있던 건 아니지만 이 과정 하나하나가 사회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2000년 학생운동의 격동에 있던 임 씨와 노 씨는 청년들이 당면한 사회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함께 나섰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임 씨는 “과거처럼 지금 다수의 청년이 꼭 사회 문제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만 이에 대해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언젠가 변화할 거라고 본다”고 전했다. 노 씨는 “지금 정치가 55세에 양복을 입은 남성의 것이라 해서 참여하지 않으면 결국 청년들이 꿈꾸는 나라는 더 멀어진다”며 “기존 정치인이 더 노력하는 건 물론이고 청년들이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것을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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