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과 지난해 8월 두 차례에 걸쳐 방문한 부산 완월동에서 120년 넘은 성매매 집장촌이 주던 긴장감을 기억한다. 한때 붉은 조명 아래 성매매 여성을 전시했던 유리창은 온통 빨간 래커칠로 칠해져 있었다. 손님을 호객하기 위한 ‘나까이’의 의자는 가죽이 벗겨져 있었다. 일제 유곽이 형성됐을 무렵 길과 건물 구조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성매매 업소가 있는 건물 밖으로 나오다가, 지나가는 자원봉사단을 마주하고 황급히 문을 닫는 사람을 봤다. 손님이 있으니 오지 말라고 하거나 경찰 단속이 심하다고 호소하는 관계자를 직접 마주하기도 했다. 다 스러져가는 지역에서도 ‘성’은 팔리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를 논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다. 성매매 업소는 모두가 그 존재를 알지만 불편해 모른 척 묵인해버리는 곳이 돼버렸다. 그러는 사이 한반도 최초의 성매매 집결지 부산 완월동은 사라지지 않은 채 2,000여명이 넘는 여성이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집창촌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돈을 빌미로 포주는 성을 착취하고 성매매 피해 여성들은 좁은 방을 전전했다.

2024년 현재 완월동은 그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무작정 빛나고 좋아 보이는 마천루를 세우고 있다. 지난 과거를 짚어 반성할지 덮고 넘어갈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인데, 안타깝게도 완월동은 과거를 덮고 넘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지난 3월 28일에 찾은 완월동에는 여전히 ‘어두운 과거를 지우고 서부 부활 새로운 미래의 건설을 축하한다'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그러나 있었던 사실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허울을 없애도 본질은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점점 더 깊이 숨어들 것이다. 그 어느 지도에서도 부산의 완월동이라는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부산시는 이름이 지도에서 지워진 것처럼, 완월동 위에 주상복합건물을 지어 공간조차 원래 없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국적을 막론하고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려는 사람들은 있다. 필자는 지난 반년간 완월동을 취재하며 이러한 움직임을 발견했다. 완월동 일대를 돌며 운영 업소를 파악하는 ‘라운딩’과 완월동에 거주하는 성매매 피해자에게 지원 물품을 전달하는 ‘아웃리치’ 활동에 참여했다. 완월동 역사와 장소성에 대한 토론회와 한성1918에서 진행된 완월 아카이브 전시회도 다녀왔다. 전시회에서는 기록물을 보존하는 시민 아키비스트들과 성매매 피해 여성들이 협업한 여러 작품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해당 전시는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을 전시한 ‘표현의 부자유전’ 행사의 실행위원 오카모토 유카가 기획에 참여했다. 일본에서부터 온 연대와 응원의 쪽지가 전시장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들은 ‘언젠가 바뀔 것’이라는 불투명한 희망을 믿으며 노력하고 있었다.

현재 완월동 여성들의 이야기는 사회가, 심지어는 여성들 스스로조차도 피해라고 생각하지 않아 ‘말할 수 없는 일’이 돼 버렸다. 성매매 집결지의 피해 여성들은 마지막까지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셈이다. 그러나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꾸준히 성매매 피해자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세상으로 나오도록 손을 내민다. 성매매의 역사를 무조건 덮기보다는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발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완월동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성매매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최윤희 정기자
                     최윤희 정기자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